고구려·백제·신라는 각각 영토를 확장해 가면서 확대된 지방의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지방의 행정·군사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들 조직의 틀이 되는 관리(官吏)는 중앙으로부터 파견하거나 해당지역의 원래의 토착세력을 이용하였는데, 도사(道使)는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지방관 중의 하나였다.
지방관으로서의 도사의 명칭은 고구려·백제·신라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다. 삼국시대 도사가 지방관으로 파견되기 시작한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신라의 경우 561년(진흥왕 22)에 세워진 「창녕진흥왕순수비(昌寧眞興王巡狩碑: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그 이전에 건립된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영일냉수리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에 도사의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 「영일냉수리신라비」가 443년(눌지왕 27) 또는 503년(지증왕 4)에 세워진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도사는 최소한 443년 혹은 503년 이전에 성·촌에 파견되었음이 확실하다.
고구려의 경우 지방의 큰 성에는 욕살(褥薩)이라는 지방장관이 파견되고, 휘하 작은 여러 성에는 도사가 파견되었다. 고구려의 도사는 일명 ‘처려근지(處閭近支)’라고도 불렸으며, 도사의 치소(治所)를 ‘비(備)’라 했다고 한다. 도사가 파견된 성보다 더 작은 소성(小城)들에는 ‘가라달(可邏達)’과 ‘누초(婁肖)’라는 관리를 두었다. 이러한 서열 상으로 고구려의 도사는 지방행정체계에서 비교적 높은 위계의 지방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군(郡)에 해당하는 성에 도사를 파견했으나 백제는 현(縣)에 해당하는 성에 도사를 파견하고 도사를 ‘성주(城主)’라고도 불렀다. 백제와 신라의 도사는 비교적 말단의 지방관이었다. 신라의 도사는 행정촌(行政村)에 파견된 지방관이므로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백제의 방(方)-군-성 행정체제 성립이 538년 부여 천도를 전후한 무렵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도사는 백제보다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의 도사 파견은 5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도사라는 지방관 파견에 의해 중앙권력의 직접적인 지방지배를 실현할 수 있었다. 도사는 주(州)·군(郡)의 하위 행정단위인 촌 또는 성에 파견되어 중앙정부의 지방통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도사의 파견지는 전국에 걸치는 것이 아니라 왕경의 지배세력이 통제할 수 있었던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여러 명의 도사가 특정한 행정촌에 파견되었으면서도 그 인근의 촌을 포함한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을 아울러서 관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가야지역과 한강유역 진출과 같은 새로운 영역의 확장 속에서 도사가 파견되는 행정(성)촌의 수는 상당히 증가하였다. 도사 파견지가 점점 늘고 본래적인 거점지역의 영역 자체에만 한정될 정도로 그의 관할범위가 축소되면서 6세기 후반단계의 도사는 거의 현령(縣令)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여 갔을 것으로 보인다.
도사는 조세의 수취 등 행정적 임무 뿐 아니라 역역(力役) 및 군역 동원 등을 담당하였다. 유사시에는 군사지휘관으로서 군주(軍主)·당주(幢主)를 보조하는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도사는 행정관의 성격만을 띠고 있으며, 촌·성의 주민을 단위로 한 군사적 기능은 당주(幢主)와 촌주(村主)가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도사는 지방행정의 기초단위인 행정촌·성에 파견된 지방관이었다는 점에서 중고기 지방제도 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신라통일기에는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도사는 소수(少守)·현령으로 바뀌었으며, 기능과 성격도 약간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