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찬 문집 중의 일부로 모필본이다.
내용은 먼저 스승인 최익현(崔益鉉)의 인격과 사상을 칭송하고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비판하며 의병봉기의 이유를 유학자의 입장에서 설명하였다. 또, 거사를 위하여 준비한 장비와 식량 등을 숫자까지 들어 소상하게 이야기하였다.
당시 의병의 수는 900 명이었으나 총검을 소지한 자는 300 명에 불과하였다고 하여 의병의 열악한 전력을 말하고 있다.
또한, 어명이라 하여 광주의 소대장이 의병해산칙서를 가져왔다고 하며, 전주소대장이 군인 50명을 거느리고 와서 주둔하는 바람에 의병이 해산되어 14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밖에 대마도(對馬島)에서 최익현이 사망할 때의 사정, 그의 유서와 유소(遺疏)를 가지고 유해와 함께 귀국하여 1907년 석방된 사실 및 그뒤 계속 국권회복을 준비한 일 등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은 을미의병의 규모와 무장의 수준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