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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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백제 석관묘
부여 백제 석관묘
선사문화
유물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돌, 특히 석판으로 만든 널.
이칭
이칭
석관(石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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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돌, 특히 석판으로 만든 널.
개설

‘석관(石棺)’이라고도 한다. 돌널은 널을 다시 둘러싸서 보호하는 돌덧널〔石槨〕과는 원래 기능상 다른 것이지만, 돌널의 규모가 클 경우에는 돌덧널과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돌널의 시원적인 형태는 조합식 돌널이다. 이는 쪼개지기 쉬운 돌을 판자모양으로 만들어 다시 상자모양으로 조합한 것이다. 조합식 돌널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 구유식〔槽拔式〕 돌널인데, 이는 돌을 깊게 도려내듯이 파내어서 널의 몸체와 뚜껑을 만든 것이다. 구유식 돌널은 한반도에서는 매우 드물게 만들어졌으나 세계적으로 볼 때는 역사시대 이후 매우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돌널의 설치는 직접 땅 속에 묻는 것, 지하 석곽 또는 석실에 넣는 것, 사원이나 묘소의 실내에 안치하는 것 등이 있다. 석재가 유해 보존에 매우 효과적인 재료이므로, 돌널은 선사시대 이래 세계적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용되고 있다.

내용

돌널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강 상류에서 이미 청동기시대의 초기인 안드로노보기(Andronovo期, 서기전 1700∼서기전 1200)에 발생해서 카라수크기(Karasuk期, 서기전 1200∼서기전 700), 타가르기(Tagar期, 서기전 700∼서기전 200)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여기서는 대개 뚜껑과 벽을 각각 1장의 판석으로 만들었다. 만주지역에서는 청동기와 석기가 같이 출토되는 돌널무덤들이 분포한다. 이것들은 벽과 뚜껑을 각각 몇 장의 판석으로 구성하였다. 서양에서도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로마시대에 화강암 또는 대리석으로 만든 구유식 돌널이 성행하여 측면을 부조로 장식하는 수법이 매우 발달하였다. 한반도의 돌널무덤은 청동기시대부터 등장하는데, 시베리아∼만주지역의 것과 계통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청동기시대에 돌널무덤에 이용된 돌널 중 뚜껑과 벽을 각각 1장의 얇은 판석으로 만든 것은 강계·강서·사리원·봉산·양구·단양 등지의 주로 황해도 이북의 서북한지역에 분포한다. 뚜껑과 벽을 각각 몇 장의 판석으로 만든 것은 주로 한강 이남 지역에 집중해 나타난다. 분포권은 한반도와 만주에 두루 걸쳐 있다. 이 외에 강원도 춘천시 천전리의 경우같이 돌무지무덤〔積石塚)의 하부구조로서 소형 돌널을 사용한 경우가 있다. 또 남부지방에서는 돌널이 고인돌〔支石墓〕의 지하구조로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돌널의 전통은 삼국시대로 이어졌다. 부여 가증리에서 발견된 5기와 김해 회현동패총에서 발견된 5기 등이 그 예이다. 또 고성 송천리고분군과 같은 판석돌덧널무덤〔板石石槨墓〕은 돌덧널무덤〔石槨墓〕이면서도 사실상 돌널무덤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삼국시대 이후에는 돌널무덤보다 돌덧널무덤과 돌방무덤〔石室墳〕이 성하게 되었다.

돌덧널무덤은 낮은 구릉지대에 주로 분포하며 돌덧널 안에 나무로 짠 널을 넣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돌덧널무덤유적으로는 화성 마하리, 천안 용원리고분군이 있다. 돌방무덤은 판돌이나 깬돌을 활용해 널을 안치할 수 있는 방을 만든 무덤이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공주 송산리고분군, 충주 누암리고분군을 들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석실분 내에 구유식 돌널을 안치한 경우도 있지만 이는 극히 예외에 속하며, 대부분 나무널〔木棺〕이 이용되었다. 7세기 중엽 이후에는 불교식 화장이 유행되기 시작하면서 골호(骨壺)를 안치하는 데 석함(石函)이나 석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화장묘로서의 석관장(石棺葬)이 상류층에 많이 보급되었다. 이 경우의 돌널은 점판암 등으로 90×40×40㎝ 정도의 크기로 만들었다. 단벽석(短壁石)에는 구멍을 뚫어 장벽석(長壁石)에 맞물리게 하고, 바닥에는 홈을 파 벽석이 물리게 해서 단단하게 만들었다. 돌널의 외면에는 4신(神)·12지신상(十二支神像) 등을 조각하였으며, 널의 내벽면 또는 뚜껑의 내면에는 묘지(墓誌)를 새기기도 하였다. 내부에는 화장한 유골을 골호나 목궤에 넣어 안치하였다.

또 고려시대의 돌덧널무덤 중에는 강화군 외포리의 것같이 돌널무덤의 형태를 띤 것들이 있다. 돌널은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존속하고 있으며, 나무널과 함께 대표적인 널로 이용되어 왔다.

한반도의 돌널은 이미 청동기시대에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일본에서는 특히 고분시대(3∼7세기)부터 구유식 돌널이 매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할죽형(割竹形)·배형〔船形〕·함형〔長持形〕·집형〔家形〕·횡구식형(橫口式形) 등의 여러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묘제의 변천」(윤무병, 『충남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논문집』 2·5,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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