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형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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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 서수형 명기
도기 서수형 명기
선사문화 /고대사
유물
원삼국시대 후기에서 삼국시대에 걸쳐 제작된 동물형상의 토기.
정의
원삼국시대 후기에서 삼국시대에 걸쳐 제작된 동물형상의 토기.
개설

이형토기의 하나로 일반적인 토기류와는 달리 물건을 담는 몸체 자체를 사실적인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동물형토기의 특징은 속이 비어 있고 꼬리부분이 둥글게 트였거나 등에 토기 아가리 같은 원통형 입이 달려 있는 점이다. 그러나 구멍이 없는 것도 있고 또 굽접시의 몸체를 양쪽에서 오므려 배〔舟〕모양 또는 귀잔 형태로 만들고, 그 한쪽 끝에 새머리형을 만들어 붙인 것도 있다.

또 하나의 구조적 특색은 용기로서의 안정을 위해 대부분 굽다리가 달려 있는 점이다. 고구려·백제 토기에서는 발견 예가 거의 없으며 신라·가야 토기에서 많이 보인다.

내용

형상에 의해 조형토기(鳥形土器)·마형토기(馬形土器)·기타동물형토기로 구분할 수 있다. 조형토기는 원삼국시대 후기의 와질토기에서부터 보인다. 원삼국시대의 것은 닭과 오리의 모습을 절충한 듯한 형상이다. 삼국시대의 것은 오리를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다. 낙동강유역의 가야지역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오리나 새 등은『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 변진조(弁辰條)에 “죽은 자를 보내는 데에는 커다란 새깃을 가지고 하는데, 이는 죽은 자의 영혼이 날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죽은 자를 하늘로 올려 보내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을 저 세상에 인도하는 구실을 한다고 하여 장례식 때 새를 이용한 풍습이 강한 것을 생각한다면 이 토기들은 모두 묻힌 이의 영혼을 명부(冥府)세계로 운반하는 교통수단의 의미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리는 고대의 압록강이나 낙동강에 무리로 서식하고 있어 고대인의 주요한 식량원의 하나였다. 때문에 오리는 죽은 자에 대한 공물(供物), 말하자면 고대인의 중요한 수렵대상으로서 상징적 존재이기도 하고, 또한 명기로서 부장되었던 것이라고 보인다. 한국의 재래식 결혼식에서 신랑이 나무 기러기를 신부측에게 건네는 것도 식량채집이라는 남성의 임무를 충분히 다하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맹세이고, 이 경우도 새는 ‘수확물=식료’의 상징이 되고 있다.

조형토기의 형식을 나누면 사실적이고 몸체에 동작감이 있는 사실형식과 삼각형 몸체에 작은 머리를 가진 소두형식(小頭形式)으로 대별할 수 있다. 백제토기로는 서산 남정리(南井里) 출토의 닭모양토기 1점이 있을 뿐인데 소두형식에 속하는 것이다.

마형토기는 수량이 조형토기에 비해 극히 적다. 개나 말은 고대인(古代人)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수송수단의 하나였다는 점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태우기 위한 동물로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노산리(魯山里) 개마총(鎧馬塚)의 벽화에서는 성장한 말을 마부가 끌고 있고 사람은 타고 있지 않는 모습에 ‘말에 주인이 타고 있는 상(像)’이라고 묵서(墨書)가 되어 있는 것은 결국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해도 죽은 자가 말에 타고 하늘로 오르고 있다라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말모양 토기의 성격은 이러한 영혼을 태우는 수레로서의 의미이고, 고인(故人)이 저 세상에서 탈 말이다. 말하자면 말을 순장(殉葬)하는 대신에 묻힌 것이다. 마형토기에는 각종 말갖춤들이 표현되어 있는데 삼국시대의 기마풍습을 잘 알려주고 있다. 즉 금령총 출토의 기마인물형토기는 가슴에 긴 주구(注口)가 달린 주자형 토기형식으로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며, 시기적으로 뒤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타 동물형토기에는 거북형토기·호랑이형토기〔虎子〕등이 있다. 거북형토기로는 대구 달성공원 출토품이 있으며, 경주 미추왕릉지구 출토품 중에는 몸체가 거북형태이나 머리와 꼬리는 용의 형태를 한 것도 있다. 한편 경주 황남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거북모양 토기는 몸체 군데군데 달개[瓔珞]를 달고 등의 앞뒤쪽에 기다랗게 부리를 만들었는데, 꼬리가 긴 것을 보아 본래는 용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호랑이형토기는 백제토기에서 일부 보인다. 이것은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의 청자기를 모방한 것이다. 양모양의 청자기도 백제고분에서 발견되었으나 육조의 것이 수입된 것이다. 이밖에 뿔잔의 끝부분에 말머리를 붙인 것도 있으나 마형토기로서는 비주류이다.

이 동물형토기들은 술과 같은 특수한 액체를 담기 위한 용기였다고 믿어진다. 이러한 특수형태를 취한 것은 이들이 특수한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임을 알려준다.

동물형토기는 서아시아지방에서 신석기시대부터 발생해 각지에 퍼진 특수목적으로 사용된 의기이다. 중국에서는 용산(龍山)문화기부터 보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우리 나라의 동물형토기는 연대가 3세기 후반 이전으로 올라가는 예가 없고 대부분 4∼6세기에 속한다. 대체로 중국 육조의 동물형토기 영향으로 발생한 것이거나 낙동강지역의 특수한 사상 또는 신앙을 배경으로 독자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낙동강유역(洛東江流域)의 상형토기연구(象形土器硏究):가야문화권(伽耶文化圈)의 사례(事例)를 중심(中心)으로」(이은창, 『가야문화(伽倻文化)』13, 2000)
『가야(伽倻)·신라(新羅) 동물형 토기(動物形 土器)에 관한 연구』(유재만, 단국대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0)
『신라시대(新羅時代) 동물조각(動物彫刻)의 조형적(造形的) 특징(特徵)에 관한 연구』(전병학, 영남대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0)
「신라가야동물형토기소고(新羅伽耶動物形土器小考)」(김원룡, 『한국학보(韓國學報)』13, 1978)
『韓國の考古學』(金廷學 編, 河出書房新社,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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