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469년(자비마립간 12)에 경도(京都)의 방리명(坊里名)을 정하여 수도의 행정조직을 정비하였고, 487년(소지마립간 9)에는 처음으로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 해당 관서로 하여금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함으로써 교통 도로망을 정비하기에 이르렀다.
수도와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 도로망의 정비는 물자의 수송을 용이하게 하여 사방의 물화(物貨)가 수도에 모이게 되었다. 이에 490년에는 서울에 시사(市肆)가 설치되어 물화 유통의 편리를 도모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지증왕(智證王)대는 권농정책(勸農政策)과 우경(牛耕)의 장려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또 주 · 군 · 현제(州郡縣制)의 실시로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점차 강화되어 공부(貢賦) 수취도 보다 활발해졌다.
5세기 이전의 신라는 재지 수장층(首長層)을 통한 공납(貢納) 지배가 주요한 재정수입원이었다. 이는 해당 지역의 특산물이나 노동력을 중앙에 복속의 징표로써 바치는 체계였다. 따라서 그 수요가 부족한 경우도 발생하였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무렵부터는 지배 영역이 확대되고 국가의 일원적인 통치질서가 성립되면서 공납물로 충당할 수 없는 부분은 국가가 관영 수공업을 운영하거나 지방의 수공업자를 동원하여 조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중앙 관부와 관영 수공업장의 물품 수요 때문에 관시(官市)와 관상(官商)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에 509년에는 기존의 시장을 정리, 개편하여 동시를 개설하고 그 관리감독관청으로서 동시전(東市典)을 설치하였다. 동시전은 시장개폐의 시각, 도량형의 사용, 상인 간의 분쟁, 어용상품의 조달, 잉여생산물의 판매 등의 업무를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전의 관원으로는 우두머리인 감(監) 2인, 대사(大舍: 경덕왕대에 主事로 고침) 2인, 서생(書生: 경덕왕대에 司直으로 고침) 2인, 사(史) 4인이 있었다. 감은 나마(奈麻)에서 대나마(大奈麻)까지의 관등소지자가, 대사는 사지(舍知)에서 나마까지의 관등소지자가, 서생은 선저지(先沮知)에서 대사까지의 관등소지자가 임명되었다.
동시 및 동시전의 설치로 경주는 상업도시적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그 뒤 695년(효소왕 4)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가 설치됨으로써 시장기구는 보다 정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