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3세기 전반 무렵 동예는 북으로 고구려·옥저(沃沮)와 접하고, 남으로 진한(辰韓)에 이어지며, 서로는 낙랑군(樂浪郡)과 접했다고 전한다. 인구는 2만여 호(戶)에 혼인·장례 등의 풍속과 언어가 고구려와 비슷했으며, 의복은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 동예인들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족속이라 하였다고 한다.
동예지역은 처음 위만조선(衛滿朝鮮)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서기전 108년 한(漢)나라의 침략으로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한나라가 원산·안변 일대를 중심으로 임둔군(臨屯郡)을 설치하자 동예의 북부지역이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기전 82년 임둔군이 폐해졌고, 서기전 75년에는 현도군(玄免郡)이 고구려족의 저항에 의해 요동으로 물러나게 됨에 따라, 옥저와 동예지역 7개현은 새롭게 설치된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동부도위는 동예의 불내성(不耐城)에 치소(治所)를 두었다.
이어 30년 동부도위가 폐해짐에 따라 낙랑군에 귀속되었다. 낙랑군은 동예 각 읍락의 족장들을 현후(縣侯)로 삼았다. 곧 재래 읍락의 족장들에게 읍락 내의 일을 자치적으로 처리하게 하고, 낙랑군에서 통괄해 간접지배를 행하였다. 현후인 각 족장은 낙랑군 지배시기의 관리 명칭을 사용해 휘하의 사람들을 공조(功曹)·주부(注簿) 등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읍락의 거수(渠帥)들은 스스로 ‘삼로(三老)’라 칭하였다. 삼로는 한 대(漢代)에 향촌에서 풍속을 관장하던 장로(長老)에게 주어졌던 존칭이다. 그 뒤 읍락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낙랑군의 세력이 후퇴함에 따라 한군현 시대의 유산으로 남아 있던 칭호들이 모두 소멸되었으나, 불내예(不耐濊)의 경우는 3세기 전반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다.
대체로 2세기 후반 경에 동예의 읍락들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의 동예지역 읍락에 대한 지배는 옥저의 그것과 동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읍락 내의 일은 족장으로 하여금 자치적으로 영위하게 하고, 족장을 통해 공납을 징수하는 간접적인 지배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예는 2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는데, 245년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 등이 동예를 공략하였다. 이때 동예의 주요 읍락들이 위군(魏軍)에 투항하였다. 고구려가 위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는 피해를 당하고 세력이 위축되자, 동예는 낙랑군의 영향 아래 귀속되었다.
그 뒤 진(晉)나라의 쇠퇴와 함께 고구려가 낙랑군을 병합함에 따라 동예지역은 다시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강원도 지역의 동예는 여전히 고구려의 지배 밖에 있었는데, 광개토왕(廣開土王, 392∼412)대에 정벌전이 감행되어 많은 촌락이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는 당시 고구려가 정복했던 일부 동예지역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강원도 남부 이남 동해안의 동예 촌락은 신라에 병합되었다.
광개토왕비문에서 보듯 예(濊)는 5세기 전반까지도 다른 종족과 구분되는 하나의 종족단위로서 존재하였다. 그 뒤 고구려와 신라가 지방제도를 정비하는 등 정복지역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영역 내의 지역 간 교류가 증진되는 등의 정세진전에 따라 동예인은 고구려나 신라의 지방민으로 편제되어 점차 융합되었다. 이에 하나의 종족적 단위로서의 존재는 소멸되어갔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전하는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 동예의 사회상을 보면, 산과 내[川]를 경계로 하여 구역이 나뉘어 있어 함부로 다른 읍락의 구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한다. 이를 어겼을 경우 곧 벌책을 가해 생구(生口), 즉 노예나 소, 말 등으로 보상하게 했는데, 이를 일컬어 ‘책화(責禍)’라 하였다.
또 같은 성(姓)끼리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꺼리는 것이 많아 가족 중 한 사람이 질병으로 사망하면 곧 살던 집을 버리고 새 집으로 옮겨갔다. 또 호랑이를 섬겨 신으로 여겼다. 여기서 말하는 성이란 곧 씨족을 뜻하는 것으로, 족외혼(族外婚: exogamy)의 풍속을 말한다. 살인자는 죽였고, 도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주옥(珠玉)을 보물로 여기지 않았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밤낮으로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며 즐겼는데, 이 축제를 ‘무천(舞天)’이라 하였다. 동예인들은 긴 창을 만들어 사용했으므로 보병전에 능하였다.
동예사회는 생활상은 공동체적 유대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천을 경계로 한 일정 지역 내의 경작지는 읍락구성원에 의해 분할, 점유되었을지라도 산림과 풀밭·하천 등은 읍락 공동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다른 읍락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은, 곧 읍락 내의 사람이 그의 경작지를 다른 읍락인에게 양도하려고 할 때는 자신이 속한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러한 공유지의 존재와 경작지에 대한 읍락의 관할권은 읍락 전체의 공동체적 결속의 물질적인 토대가 되었던 것 같다.
족외혼의 풍속에 따른 혈족간의 유대와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는 등의 신앙 및 무천과 같은 공동의 축제와 의식(儀式)은 공동체적 유대를 강하게 지탱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예의 읍락에는 노예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사회분화가 크게 진전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병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 곧 살던 집을 버린다는 것은 터부(taboo)에 따른 것이지만, 아울러 당시 동예인들의 집이 매우 소박한 것이었으며, 부(富)의 축적도 별로 많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동예인은 농사를 주업으로 했으며,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해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예견하는 등 그들 나름의 경험에 의한 농사관리를 도모하였다. 직물로는 마포(麻布)가 있었고, 누에를 길러 풀솜을 사용하였다. 반어피(班魚皮)·표범가죽·과하마(果下馬)·단궁(檀弓) 등이 유명했다.
이렇듯 동예사회가 농업을 주요한 산업으로 하고, 직조기술이 있는 등 상당한 정도의 생산력을 가졌고, 중국문물의 영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분화에 큰 진전이 없었던 것은 위만조선과 한군현, 고구려 등 주변의 강대한 세력들에 의한 잇따른 지배와 수탈이 주요 원인의 하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불내예는 동예의 읍락 중 대표적인 것으로 낙랑군 동부도위의 치소였으며, 뒤에까지 한군현의 관직명이 사용되는 등 중국문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45년 위군(魏軍)의 침공 때 투항하였고, 247년 불내예후는 위나라에 조공해 불내예왕으로 봉함을 받았다. 그러나 불내예왕의 거처는 일반 읍락민 사이에 섞여 있어 뚜렷이 구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점은 당시 동예 읍락 내 사회분화의 정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부여나 고구려의 제의(祭儀) 형태는 국중대회(國中大會)로 통합된 모습을 보이지만, 동예와 삼한은 각각 천신(天神)과 호신(虎神), 또는 국읍의 천신과 별읍의 귀신(鬼神)으로 제사대상이 구분된다.
이를 동예에 적용시키면 불내예후와 같은 소연맹국의 지배자는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고, 읍락단위에서는 전통적으로 고수되어 온 호신숭배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호신신앙은 단순한 읍락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고 무천(舞天)과 같은 의례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읍락의 호신숭배는 집단의 결속과 연대를 상징하는 혈연 집단의 존재와 연관되는 토템신앙의 전통과 맥이 닿는다. 호신은 읍락을 지켜주는 정신적 보호자 역할을 했으며, 읍락민들은 호신에 대한 제의(祭儀)를 통하여 재앙방지와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또한 동예의 호신신앙은 읍락 단위의 정기적인 제의로 시행되면서 읍락 내에 산재해 있던 공동체 구성원의 결속력을 강화하였는데, 집단적인 가무행위(歌舞行爲)는 제의과정의 한 부분으로 제의에 참여한 읍락민의 일체감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