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관리가 되어 급벌찬(級伐飡)의 관등에 올랐다. 그는 진평왕 말기에 화랑 죽지랑(竹旨郎)의 낭도로 있을 때 모량부(牟梁部) 아찬(阿飡) 익선(益宣)에 의하여 부산성(富山城) 창직(倉直)으로 차출되어 나갔다가, 강제로 그의 밭에서 부역하게 되었다.
이에 죽지랑이 낭도를 이끌고 그가 일하는 현장에 달려가 익선에게 휴가를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결국 죽지랑이 그에게 진절(珍節) 사지(舍知)의 기마안구(騎馬鞍具)를 선물로 주어 득오의 휴가를 얻어냈다. 이 소식이 조정의 화주(花主)의 귀에 들어가 익선은 처벌을 받았고, 득오는 부역에서 면제되었다.
뒷날 득오는 죽지랑을 사모하는 노래인 <모죽지랑가 慕竹旨郎歌>를 지었다. ≪삼국유사≫에는 득오의 부역 사실이 효소왕 때의 일인 듯 기록하였으나, 이는 진평왕 때의 사실을 효소왕 때에 회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