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5월 카자흐스탄공화국 크질오르다(Kzyl-Orda)시에서 창간되어 1978년 8월 알마아타(Alma Ata)시로 이전하여 발행되었다. 소련어 제호는 ‘Ленин киӌи’로, 소련에서 발행되고 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한글 전국신문이었다.
이밖에 소련에서 한글로 출판된 신문으로는 『레닌의 길로』가 있는데, 이 신문은 사할린〔樺太〕의 유즈노 사할린스크(Yuzhno Sakhalinsk)시에서 1949년에 창간된 이래 오늘날까지 매주 3·4회 발행되는 지방신문이다.
『레닌기치』는 주 6회 발행되는 일간신문으로, 전 소련에서 구독할 수 있는 전국신문이었다. 한때 4만 부가 발행되던 적도 있었으며, 1982년부터 사진식자기에 의한 방법으로 활자를 바꾸어 모든 신문을 한글로만 제작하였다.
레닌기치사에는 주필에 한인(韓人) 노겐치, 그리고 부주필인 윤수찬을 중심으로 편집국, 당생활 및 선전부·농업부·문화문예부·국제보도부·공업부·독자투고 및 대중사업부 등의 직원 60여 명과 본사기자·직외기자·특파원, 『타스통신』·『에이 피 엔 통신』, 그리고 한인집단거주지인 타슈켄트·크질오르다·두삼배·프른제 등지에 지사를 두었다.
신문 전지 4면인 『레닌기치』는 사진식자기 6대와 서독제 오프셋인쇄기로 제작되었다. 신문의 내용은 1면에는 정치, 즉 소련정부의 중요한 정치기사, 2면에는 1면 뉴스에 대한 해설이나 공화국 내 중요기사, 3면에는 지방뉴스들을 게재하였다. 제4면에는 매달 2·3번 정도 문예면을 실어 재소한인들의 유일한 문예작품 발표장이 되었다.
여기에는 시·수필·단편소설·문예평론 등 다양한 문예작품들이 발표되었는데, 1980년 이후 『레닌기치』에 발표된 재소한인들의 단편소설은 강대수의 「우정」을 포함하여 10여 명의 20여 편이나 된다. 이러한 단편소설들은 재소한인들에 의하여 순수 한글로 쓰여졌으며, 재소한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재소한인평론가 한진이 주장하듯이 재소한인들의 생활을 진실하게 반영하기 때문에 많은 재소한인들의 공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재소 한글시인들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연성용강태수·김두철·우제국·이은영·정장길 같은 시인들이 좋은 예이다.
소련에서 우리의 한글과 말이 100년 이상 존속되어 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이 『레닌기치』이다. 이러한 『레닌기치』의 공에 대하여 발행 1만 호 기념일인 1983년 6월 21일 사설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오늘 본보의 10천 번(1만 번)째 정기호가 세상에 나타났다. 독자들과의 10천 번째 상봉-이 상봉들은 여러 가지였다. 명절날에도, 다망한 날에도, 경사에도, 시련의 날에도 신문은 어김없이 독자를 찾아갔다. 레닌기치가 창간되어 오늘의 특간물에 이르기까지 45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본보의 지면들에서는 우리나라 소련 다민족 가정의 친선, 국제주의식 통일과 집단주의, 이 가정의 당당한 성원이 된 소련 조선인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레닌기치』는 구(舊) 소련이 붕괴되기 바로 1년 전인 1990년 12월 31일 폐간되었다. 한편, 『고려일보(高麗日報)』가 『레닌기치』와는 무관하게 “재쏘고려인전국신문”으로서 1991년 1월 1일자로 소련 중앙정부로부터 정기간행물 발간허가를 얻어 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