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학은 최익현의 문인 가운데 젊은 세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 자료는 그가 의병운동 과정에서 줄곧 최익현을 수종(隨從)하면서 그날 그날의 사건을 일기체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도 높고 내용도 자상하다.
최익현이 의병운동을 준비하는 단계인 1906년 4월 1일부터 대마도(對馬島)로 압송되기 직전인 그 해 6월 26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 기간은 약 두 달 정도의 짧은 시기이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을 성토한 상소문과 의병운동의 정당성을 천명한 창의격문(倡義檄文) 등의 자료를 포함, 의병운동에 동참한 지사들의 명단인 ‘동맹록(同盟錄)’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첫 장에는 의병을 일으키기에 앞서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보내는 격문, 일제침략을 16개의 조목으로 논박해 일본정부에 보내는 항의문이 실려 있다. 이어 창의일기가 연월일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즉, 전라도 태인(泰仁)의 종석산(鍾石山)에서 임병찬(林炳瓚)과 거의(擧義)를 결정한 다음 고종에게 상소한 일, 담양의 용추사(龍湫寺)에서 기정진(奇正鎭) 등 호남 선비 50여 명과 시국을 논의한 일, 태인의 무성서원(武成書院)의 강회(講會)를 계기로 거의하여, 800여 명이 여기에 동참해서 순창 등 인접 고을이 한때 의기로 충만했던 일 등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남원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사실과 이 의병진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전주·남원 진위대와 대치하게 되었을 때 동족상잔을 막기 위해 최익현 스스로 의병부대를 해산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최익현의 문인인 정시해(鄭時海)가 진위대의 공격에 의해 전사한 사실 등과 최익현을 비롯한 의병진의 주요 간부 13명이 일본헌병과 조선 관헌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던 노정의 전말 및 최익현의 대마도 유배 결정과정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최제학의 문집인 『습재실기(習齋實記)』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