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안에 쓰인 묵서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모두루총(牟頭婁塚)’이라고 부른다. 무덤의 주인공을 염모(冉牟)로 보아 ‘염모묘’로 일컫기도 한다. 현재 중국의 공식명칭은 ‘하해방묘구(下解放墓區) 제1호묘(JXM001)’이다. 1935년 발견되었으며 1963년부터 파손된 부분이 일부 수리되었고, 1978년에는 묘지(墓誌)에 화학안료의 막을 입혀 보존하였다. 집안분지 동북의 하해방(下解放) 들판과 산기슭에는 50여 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루총은 들판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모두루총은 돌방봉토무덤으로 직경 22m, 둘레 70m, 높이 4m이다. 외형은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이고, 내부구조는 널길(羨道), 앞방(前室), 통로, 뒷방(玄室)으로 구성된 두방무덤(雙室墳)으로서 앞방에 옆방(側室)이나 감실(龕室)은 없다. 널길은 길이, 너비, 높이가 1.3×1.1×1.1m이다. 앞방은 2.9×2.1×2.8m로서 남북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고, 뒷방은 3.0×3.0×2.9m로서 정방형이다. 뒷방의 동서 양쪽에 2.25×0.8×0.2m인 널받침(棺臺)을 하나씩 놓았다. 벽은 다듬은 석재로 쌓아 올린 다음 백회를 발랐는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천장구조는 앞방은 활(穹隆式)천장, 뒷방은 평행삼각고임식천장이다.
벽면에는 모두 백회를 발랐으나 벽화가 없는데, 회칠의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보아 본래 벽화를 그리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모두루총이 주목을 끄는 까닭은 앞방 안벽(동북) 모서리에서 시작하여 오른벽(서북벽) 북측에 걸쳐 묵서된 묘지(墓誌) 때문이다. 제수(題首) 2행과 매행 10자인 79행의 본문으로 이루어져 모두 800여 자에 이르지만,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3분의 1에 불과하다. 예서체(隸書體)로서 한나라의 간서법(簡書法)을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독 가능한 글자가 적어서 묘지 내용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1935년 처음 조사할 때에는 ‘대사자모두루□□노객(大使者牟頭婁□□奴客)’이라는 제수와 함께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모두루를 주인공으로 간주하여 모두루총으로 명명하였다. 그러나 중국학자 노간(勞幹)은 또 다른 등장 인물인 ‘염모’를 주인공, 모두루를 그의 노객 곧 가신으로 보아 ‘염모총(冉牟塚)’으로 개명하였다. 그렇지만 그 뒤 묘지와 관련자료를 자세히 검토한 결과, 모두루는 염모의 노객이 아니라 광개토왕의 노객 곧 신하이며, 염모는 모두루의 조부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중국에서는 1980년대까지도 ‘염모묘’로 명명하다가 최근에 ‘모두루묘’로 수정하였다.
묘지에는 5세기 전반 고구려인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비롯하여, 고구려 왕실의 출자, 대형(大兄)·대사자(大使者) 등 관등명, 영북부여수사(領北夫餘守事)나 성민(城民)·곡민(谷民) 과 같은 지방제도 관련 내용 등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또한 염모에서 모두루로 이어지는 모두루가의 흥성 과정을 통해 귀족 가문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었고, 이들과 국왕과의 관계를 통해 정치체제를 해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북부여를 둘러싼 선비(鮮卑) 모용부(慕容部), 곧 전연(前燕)과의 상쟁(相爭)도 담고 있어서 4∼5세기 대외관계를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를 준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모두루 집안은 대체로 4세기 중엽 염모가 전연의 부여 침공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워 크게 흥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염모 사후에도 북부여에 대한 지방지배에 관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묘주인 모두루도 북부여에 파견되어 지방지배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광개토왕(廣開土王) 서거 시에는 멀리 지방에서 왕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광개토왕 사후까지 생존하다가 5세기 중반경에 사망하여 이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