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 유적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왕궁평성(王宮坪城),’ ‘모지밀산성(慕枳密山城),’ 또는 ‘왕궁리성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익산 왕궁리 유적의 행정구역 명칭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 왕궁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하고 있다. 왕궁리 유적에 관한 유래는 마한 기준도읍설, 백제 무왕천도 및 별도설, 안승 도읍설, 후백제 견훤도읍설 등 다양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익산읍지』 등의 문헌들에는 이곳이 ‘옛날 궁궐터’, ‘무왕이 별도(別都)를 세운 곳’, ‘마한의 궁성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곳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여 금마저(金馬渚)라 지칭되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금마군(金馬郡)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금마군에 소속되었으나, 근대 행정 개편시에 금마면과 왕궁면으로 분리되었다.
인접한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와 함께 최대 규모의 백제 유적이다. 이 유적에는 백제 무왕 때인 639년에 건립하였다는 제석정사(帝釋精舍)터를 비롯해, 그 안에 관궁사(官宮寺) · 대궁사(大宮寺) 등의 절터와 대궁(大宮)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토성지 등이 있다.
1998년 9월 1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21만 6,862㎡이다. 1976년과 1977년에 일부 조사되어 동서 230m, 남북 450m의 규모이고, 상부대관(上部大官)의 명문이 있는 기와 등이 알려졌다.
1989년 7월부터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에 의해 연차로 전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왕궁리유적은 크게 3시기로 구분되는데, 첫째 백제 말기에 조성된 유적, 둘째 통일신라 초기의 성벽, 셋째 통일신라 초기~말기 경에 건축된 사찰 등이다.
백제 말기의 유적은 현존한 5층 석탑을 중심으로 한 북편의 동서 석축과 석탑 남측의 동서 석축 및 주변의 건물지가 해당된다. 그러나 백제 말기와 통일신라 초기에 걸쳐 건축된 건물지는 시기구분이 거의 어려운 형편이다. 이는 백제 멸망이후에도 건물은 그대로 계속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의 건물지는 총 6기가 조사되었다. 건물지 중 탑의 서편에서 조사된 건물지는 정면(동서) 13.55m, 측면(남북) 11.28m 규모이다. 건물의 칸수는 정면 9칸, 측면 5칸이 확인되었다. 이 건물지의 내부에는 중앙에 한 변이 6.3m 크기의 정방형(正方形) 방 2개있고, 이 2개의 방 사이는 2.5m 정도의 복도와 비슷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들 방의 사방에는 벽체의 기초기설이 대부분 남아 있었는데, 이 벽체부 기초는 작은 돌과 기와편 등으로 섞어 쌓은 것이었다. 또 이 벽체 사이사이에는 초석이 중심거리 1.5m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각 방의 한 변에는 초석이 4개씩 놓여 있는데, 초석 하부에 적심석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초석을 바로 놓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초석의 배치는 건물지의 하중에 따른 건축학적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백제 말기의 석탑은 남측 및 북측 석축이 있다. 석축은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석재를 이용하여 전체 길이가 143m 정도이며, 최고 2m 이상 높이로 쌓았으나 현재 잔존 높이는 0.85m 정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석축은 바닥 층에 1~2단 정도 남아 있고, 부분적으로는 잔존하지 않은 곳도 있다. 석탑의 북측 석축은 동서 165m 정도 조사되었다. 북측 석축은 통일신라시대에 사찰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석축 앞을 탑 주변까지 매몰하여 평지로 만들었다. 이 석축의 하부인 구지표층에서는 중국 수(隋)시대의 청자연화문병편이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유적으로는 직사각형으로 축조된 성벽이 있다. 성벽의 규모는 남북 길이가 493.44m이고, 동서 길이는 235m, 성벽의 폭은 3m내외이다. 남성벽 동서 양측에 정면 11.45m 규모의 동 · 서 문지가 드러났고, 서성벽에서도 정면 8.6m 내외의 서문지가 조사되었다. 그리고 성벽의 안팎에서 폭 0.8m 정도의 부석시설(敷石施設)이 노출되었다. 부석시설은 성벽과 접한 상태여서 성벽보호를 위해 조성한 것이다. 이 시기의 건물지는 가장 이른 시기의 건물지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데, 백제 말경의 건물을 지속하여 사용하였거나 필요시 개축 또는 증축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초기~후기의 유적은 사찰터(寺址)이다. 현존 5층 석탑은 이 사찰과 관련된 유적이다. 사찰의 배치는 남쪽으로부터 석탑, 금당지, 강당지가 차례로 조사되었다. 석탑은 창건 당시 조성된 것이 아닌 후대에 다시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찰 건물과 함께 존속된 유적은 강당지, 서편에 2기의 건물지와 석탑 동편에서 조사된 건물지 1기 및 통일신라 후기의 와요지(瓦窯址) 등이다. 5층 석탑은 지대석을 맨 밑에 놓고 단층기단으로 조립하고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 별석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탑 양식은 백제의 미륵사지석탑이나 정림사지석탑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 후기까지 유물이 다양하다. 백제시대의 유물로는 기와류와 토기류가 대부분이다. 백제 기와류는 수막새, 인장기와, 평기와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고, 이 중 수막새는 연화문수막새와, 태극문수막새, 소문수막새 등이 출토되었다. 기와 문양은 세 종류가 조사되는데, 중앙에 작은 듯한 둥근 자방을 배치하고 편평한 드림새에 4조의 곡선의 양각선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배치하는 것, 볼륨이 크고 주연부로 가면서 점차 가는 문양을 역시 등간격으로 4분하여 곡선으로 처리한 것, 자방을 중심으로 연화문과 볼륨 있는 문양을 겹치게 하여 4분하여 곡선으로 처리한 것 등이다. 소문수막새는 출토 유적이 극히 소량이 출토되었다.
한편, 인장기와는 도장을 기와 제작시에 찍은 것으로 ‘首府, 前部甲瓦, 前部乙瓦, 巳刀, 未斯, 戈止, 己酉, 上部’ 등의 명문이 있다. 이들 인장기와의 내용은 백제 행정지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것, 최고의 관청기관을 지칭하는 것, 간지를 의미하는 것 등으로 확인되었다.
백제토기는 대형항아리, 전 달린 토기, 뚜껑, 바리, 시루 등 다양하다.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류는 수막새, 암막새, 명문와, 평기와 등이다. 막새는 복엽단판연화문 수막새, 복엽중판연화문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괴운문 암막새가 출토되었다. 이들 막새는 대부분 금당지와 강당지에서 출토되었다.
명문기와는 문양을 타날하는 도구에 함께 새겨 압인되는 것이 대부분이나, 기와 성형시 건조전에 가는 철사나 나뭇가지 등으로 눌러 쓴 것도 있다. 이들 명문은 ‘大官寺, 大官官寺, 官宮寺, 丁易, 風道使前…, 三百…’등의 명문이 있다. 출토유물 중에는 중국 수(隋)나라시대의 청자연화문병편과 남북조(南北朝)시대의 백자 박산로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
왕궁리유적에서는 백제와 통일신라 초기의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이들 유물들과 성벽의 축조 성격 등으로 미루어보아 왕궁급과 견주어져 안승(安勝)의 보덕국(寶德國)과 관련짓거나, 이보다 앞선 시기에 백제 무왕(武王)이 이곳으로 천도(遷都)했던 유적 등으로 보려는 의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