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목례만치(木刕滿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개로왕이 간신들을 가까이하여 정사를 그르치고 도성(都城)을 장려하게 재건하여 호사를 극함에 국고는 탕진되고, 백성과 군대는 피폐, 불만과 원성이 높아 국력은 쇠약해졌다.
이때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살해된 고구려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고 또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박차를 가하던 장수왕의 대군이 쳐들어옴에 따라 조미걸취(祖彌桀取)와 함께 태자 문주(文周)을 모시고 남으로 피난갔다. 그뒤 곧 고구려의 대군이 왕경을 포위 공격하여 475년(개로왕 21) 9월 이를 함락시키고 탈출하는 개로왕을 잡아 죽였다.
문주는 목례만치와 조미걸취를 대동하고 신라에 가서 자비마립간으로부터 구원군 1만을 얻어 급히 돌아왔으나, 이미 도성은 함락되고 왕은 시해되고 고구려군은 물러갔으므로 즉위하여 문주왕이 되었다. 같은해 10월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이와 같은 국가재건의 대업을 목례만치가 보좌하여 나라의 운명을 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