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극리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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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북한군 제15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고 국군 제1사단의 음성 이동을 엄호하기 위해 무극리 일대에서 전개한 방어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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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북한군 제15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고 국군 제1사단의 음성 이동을 엄호하기 위해 무극리 일대에서 전개한 방어전투.
개설

무극리전투는 1950년 7월 4일부터 13일까지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1사단과 육군본부 직할 제6사단 제7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제15사단과 이를 지원하는 제1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무극리, 동락리, 가정동 등 음성 일대에서 전개한 방어전투의 일환이었다.

경과

북한군 제15사단은 광주∼진천 방면으로 남하하는 제2사단과 원주∼충주 및 제천 방면으로 진출하는 제12사단 사이에 발생한 간극을 메우기 위해 홍천에서 투입된 부대였다. 이 사단의 임무는 장호원을 점령한 후 음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때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여주∼장호원 간 도로를 따라 남진하는 북한군 제15사단을 저지하고 국군 제1사단의 음성 진출을 엄호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충주중학교 사단지휘소에 위치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7월 4일 20시 장호원에서 철수한 사단헌병대와 강원도 전투경찰대대로부터 북한군 제15사단이 장호원을 향해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사단장은 북한군이 계속해서 남진할 경우 서부전선이 위기에 처할 것으로 판단하고 충주중학교에 집결해 있던 제7연대에 장호원 사수를 지시하였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먼저 제2대대를 7월 4일 22시에 장호원으로 출동시키고 7월 5일 06시에 무극리∼음성 간 도로를 방어하기 위해 제1대대를 무극리에 투입하였다. 제1대대가 기름고개 정상에 이르렀을 때, 1개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보현산 동쪽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포격을 가하면서 제1대대의 전진을 저지하였다. 이에 따라 제1대대는 기름고개 동쪽의 385고지 일대에서 북한군과 대치하게 되었으며, 이날 18시경 용산리로 이동한 제2대대와 연계해 북한군의 야간침투에 대비하였다.

7월 6일 04시에 국군 제7연대 제1대대는 무극리를 확보하라는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제1대대와 제2포병중대로부터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무극리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1대대는 공격 개시 1시간도 못되어 보현산을 점령한 후 계속해서 적을 추격해 12시경 무극리를 확보하고, 14시에 무극리 북쪽 2㎞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도주하던 북한군은 새로운 병력을 증원받아 1개 연대규모로 장갑차를 앞세운 채 포격을 가하면서 제1대대를 공격하였다. 이에 대대장은 무극리의 확보를 포기하고 백야리 지역의 351고지에 진지를 편성,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제1대대가 백야리로 철수함에 따라 제2대대도 동락리의 부용산(644고지)으로 철수하였다. 제2대대는 철수 과정에서 개전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린 동락리전투를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6·25전쟁사:한강선 방어와 초기 지연작전』3(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6)
『한국전쟁』상(국방군사연구소, 1995)
집필자
박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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