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산성(北關山城)’이라고도 한다. 무순시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혼하(渾河)의 북쪽에 무순성이 있고, 이 무순성의 북쪽에 있는 고이산의 장군봉에서 남동향으로 뻗은 산등성이와 중앙부의 계곡을 에워싼 다곽식(多郭式) 산성이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4㎞가 넘으며, 7개의 구역으로 되어 있다. 해발 231.5m의 장군봉에서 동쪽의 것을 동성(東城), 서쪽의 것을 서성(西城)이라 하고, 동성의 북쪽에 규모가 작은 북위성(北衛城)이 붙어 있다.
동성과 서성의 남쪽에 남위성(南衛城)이 있고, 동성의 남단에서 동향한 능선에 3개의 고리모양[環狀]의 작은 성이 연이어 붙어 있다. 현재는 남위성과 동성의 남문을 거쳐 북문을 지나 철령(鐵嶺)으로 가는 길이 뚫려 있다. 이 성터는 고구려의 신성(新城)으로 비정되어, 여러 차례의 조사가 있었다.
1940년에는 일본인 학자들이 동성의 문터와 주거지 및 소성(小城)에 있는 탑지를 중심으로 발굴조사하였고, 1944년에는 동성의 서문터, 1956년과 1963년에는 지표조사, 1983년부터 3년간은 공원화계획과 관련하여 동성과 남위성에서 6군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장군봉 위에는 높이 15m의 판축(版築)된 토단이 있는데 장대(將臺)로 보이며, 성벽이 굽어지는 곳 11곳에 이러한 토단이 있다. 남위성의 남쪽 꼭대기에는 요(遼)·금(金)시대의 팔각전탑(八角塼塔)이 있어서 이곳이 본래 고이산이라 불렸다. 소성(小城)의 꼭대기에도 벽돌을 깐 이중기단의 팔각탑이 있다.
동성의 남문터 양쪽에는 높이가 10m에 이르는 판축된 성벽이 있고, 그 서측에 수문(水門)이 있었던 커다란 석재가 있다.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을 갖춘 문터로 여겨진다. 북문은 양쪽의 성벽이 직각으로 꺾이는 각절부(角折部)를 이룬다.
문터는 동쪽과 서쪽에도 있다. 동문터는 계단식으로 돌을 쌓은 문길의 너비가 약 5m가 된다. 서문도 석축이고, 옹성이 안쪽에 만들어졌던 구조이다.
고이산성의 전체적인 구조는 매우 복잡하지만, 고구려와 관련된 부분은 동성의 경우가 가장 확실하다. 서성도 고구려시기의 것으로 인정하는 학설이 유력하다. 남위성의 발굴에서는 후대에 속하는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동성·서성의 구조에서 역대로 계속하여 방어의 필요에 의해서 확대되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성에는 3개의 우물이 있다. 성벽은 기본적으로 흙으로 쌓았으나, 성벽의 구조는 발굴 결과 세 가지 유형으로 밝혀졌다.
하나는 융기된 산등성이에 높이와 너비를 더해 가며 판축한 것이고, 다음은 토축의 안쪽에 먼저 커다란 돌로 담을 쌓고, 그 위에서 흙을 쌓은 포골장(包骨墻)이며, 그 다음은 돌부스러기로 30∼50㎝쯤 평지에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판축한 방법 등이다. 이 때문에 축성의 기법(技法)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평원에서 요동의 산악지대로 들어오는 군사적 요충에 자리하여 이 성터가 곧 고구려의 신성으로 주장된다. 기록에는 서기 335년에 축조하였고, 4세기 후반 선비족과의 대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7세기에 이르러 수·당의 침략을 저지한 최대의 요충지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