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애무(無㝵舞)라고도 하며, 춤도구인 호리병[葫蘆]을 무애라 하기도 했다. 무애무의 기본적인 구성은 호리병을 두드리며 나아갔다 물러갔다하는 형식이며, 대체로 원무 2인과 협무 10인으로 구성되었다. 반주음악은 향당교주(鄕唐交奏)와 가곡편(歌曲編)을 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시대 어떤 광대가 큰 바가지를 가지고 춤추고 희롱하는 것을 본떠 원효(元曉)가 도구를 만들고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라는 『화엄경(華嚴經)』의 구절을 따서 ‘무애’라고 했다. 뒤에 호사가(好事家)들이 목 굽은 호로박에 장식을 하여 두드리며 나아갔다 물러갔다 하니 모두 음절에 맞았고, 밭가는 늙은이도 이를 모방하여 유희로 삼았다고 『파한집(破閑集)』에 전한다.
신라시대 원효의 독무로 출발한 무애무는 고려시대에 두 기녀와 여러 제기들이 출연하는 궁중 정재의 형태로 양식화되었다. 『고려사』 악지(樂志)의 ‘속악(俗樂)’에는 무애무의 절차가 수록되었다. 검은 한삼에 단장한 두 기녀가 무애사를 노래하고, 여러 기녀들이 화답했으며, 두 기녀가 무애를 어르다가 잡고 춤을 추는 것이 주요한 동작이다.
조선 전기까지 이러한 형태가 전승되다가 1434년(세종 16)에 불가의 말을 써서 무애 정재가 매우 허탄하고 황망하므로 사악(賜樂: 임금이 음악을 내려줌)에 그만두라고 했다. 그러나 1449년(세종 31)에 무애 정재를 항상 연습하도록 지시했으니, 무애무가 세종대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단절기를 거쳐 순조의 40세를 경축한 1829년(순조 29) 자경전 진찬에서 무동이 무애무를 공연했다. 고려시대의 구성과 형식을 계승하여 중무 2인과 협무 10인으로 구성되었으나, 무애무의 창사는 효명세자가 국한문혼용으로 새로 지었다. 1902년(임인 6) 고종황제의 51세 경축 진연까지 무애무는 계승되었다. 조선 후기 무애무의 춤절차는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나타나며, 국립국악원에 1종, 장서각에 4종의 무도홀기가 소장되었다.
또한 궁중 밖에서 무애무의 새로운 형태가 보이기도 했다. 1434년(세종 16)에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각원(覺圓)·신주(信珠)·신현(信賢) 등 세 명의 승려가 무애희(無㝵戱)를 해서 부녀자들이 시주를 한 기록이 전한다.
원효의 무애무는 대중들에게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에서 창작되었다. 고려시대 궁중정재의 형태로 무애무가 재편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불교적 색채가 짙었다. 내용적으로 변화된 시기는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국한문혼용으로 창사(唱詞)를 지었던 때이다.
무애무의 창사 중에 “빛나는 수성(壽星: 수명을 관장하는 별)이 남극성 아니신가. 끝없는 장수는 부처님의 자비가 아니신가…(중략)…어와 우리들이 태평시대에 놀았어라 백년이 이 같기를, 천년이 이 같기를, 만년 또 억만년 이 해마다 이 같기를, 우리 임금님 오래 오래 사시길 빌어드립니다.”라고 하여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내용으로 탈바꿈했다.
김천흥과 국립국악원 무용단이 무애무 정재를 재현하였다.
불교적인 기원을 갖고 있는 무애무가 조선시대에 걸맞게 내용이 변모되어 전승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