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경(王京)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화랑 귀산(貴山)의 아버지이다. 602년(진평왕 24) 백제의 무왕이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을 때, 신라의 장군 파진찬(波珍飡)건품(乾品)·무리굴(武梨屈)·이리벌(伊梨伐)과 급찬 무은·비리야(比梨耶)와 무은의 아들 소감(少監)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등은 정예기병대 수천을 거느리고 항전하여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신라군은 소타(小陀)·외석(畏石)·천산(泉山)·옹잠(甕岑)의 4성을 쌓고 백제의 국경에 진격하였다. 이에 무왕은 격노하여 좌평(佐平) 해수(解讎)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4만여 명을 거느리고 4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의 장군 건품과 무은이 완강히 항전하자 해수가 천산의 서쪽 큰 못가로 후퇴하여 복병하고 있었다.
무은이 승승장구하여 갑졸 천여 명을 지휘하여 큰 못으로 추격하였다. 그러나 무은은 백제 복병의 급습을 받아 백제군이 던진 갈구리에 당겨 말에서 떨어졌다. 이때 그의 아들 귀산이 큰 소리로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전장에서 물러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나리.” 하였다.
그리고 적군 수십명을 죽이고 자기의 말에 아버지 무은을 태워 보낸 다음 동지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분전하여 백제군을 완전 섬멸하니 백제군 사령관 해수는 겨우 혼자 빠져 돌아갔다. 귀산은 온 몸에 칼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신라는 무은·귀산 부자의 용감한 노력과 분전으로 승리하였다. 신라왕은 백관과 함께 아나(阿那) 들판에 나가 귀산의 시체 앞에 통곡하고 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