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나무의 줄기나 잔가지들은 먹으로 그리고, 꽃이나 꽃봉오리는 분홍빛으로 채색해 완성한 그림도 묵매(墨梅)라고 부른다. 꽃의 묘사법으로는 몰골법(沒骨法 : 대상의 윤곽을 그리지 않고 먹이나 채색으로 형상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담묵(淡墨)이나 홍색을 사용하는 경우와 가느다란 먹 선으로 꽃잎이나 꽃술을 묘사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매화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서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매화를 용기와 기개의 상징으로 찬미해 왔다. 북송시대에 와서 묵매는 문인화의 발달과 때를 같이하여 묵죽·묵란과 더불어 문인들이 즐겨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묵매화의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북송의 시인 임포(林逋)로서, 그는 일생 동안 홀로 은거생활을 하면서 매화나무를 집 주위에 가득 심고 학을 기르며 매화를 찬미하는 시를 지었다.
매화도 처음에는 화조화(花鳥畵)의 일부로 발달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북송시대 화광산(華光山)의 승려 화광중인(華光仲仁)이 달밤에 창호지에 드리워진 매화나무 그림자를 그대로 베껴 묵매를 그렸다는 전설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즉 매화의 상징성도 중요하지만, 형사(形似 : 대상의 형태를 닮게 그리는 것)도 중요하게 여겼던 북송 회화의 전반적인 추세에서 이와 같은 기원설이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화광중인의 작품은 없으며, 그 뒤를 이은 양무구(揚無咎)의 작품으로 전하는 것이 북경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어 초기 묵매화의 간략하고 청초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국의 묵매화 전통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로 추측된다. 『동국문헌(東國文獻)』 화가편에 고려 중기의 문신 정지상(鄭知常), 후기의 차원부(車元頫) 등이 묵매를 잘 그렸다는 기록이 전하나 현존하는 작품은 없다.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8장으로 된 묵매 화첩이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8장 모두 굵은 줄기와 가느다란 가지가 극심한 대조를 보이고 있어 당시 중국 묵매화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을 보여 준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한국적인 묵매화 양식이 확립된다. 굵은 줄기와 마들가리(새로 난 가지)의 단순한 대조에서 차차 벗어나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큰 가지와 그와 반대 방향으로 뻗은 작은 가지, 수직으로 뻗어 올라간 마들가리가 조화를 이루고, 꽃은 많이 달리지 않았으나 대체로 화려한 구도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구도는 어몽룡(魚夢龍), 허목(許穆), 오달제(吳達濟) 등의 현존 작품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조선 말기에도 묵매는 계속 유행하였다. 사대부 화가뿐 아니라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들 사이에도 널리 채택된 화목이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묵매 화가인 조희룡(趙熙龍)의 「묵매」 대련(對聯)은 길고 좁은 화폭을 용트림하며 올라가는 늙은 가지[老幹]로 채우고, 화려한 홍매(紅梅)를 가득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다른 소품에서도 그는 가지에 적용한 비백(飛白) 필치, 꽃잎 묘사의 율동적 붓놀림 등으로 다양하고 아름다운 매화를 많이 그렸다. 양기훈(楊基勳)과 장승업(張承業) 등도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대체로 기교에 치우친 듯한 느낌을 준다. 이외에 허련(許鍊)과 강진희(姜進熙) 등도 묵매로 유명한 화가이다.
조선 후기 이래로 묵매화는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과 같은 중국 화보(畵譜)의 영향을 많이 반영함에 따라 그 이전의 것들에 비하여 신선한 느낌이 덜하다. 현대에도 묵죽·묵란·묵국과 더불어 많은 여기화가(餘技畵家)들의 애호를 받으며 그 전통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