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죽(墨竹)은 보통 윤곽선을 따로 그리지 않고, 필선 자체로 대나무의 줄기나 잎의 모양을 나타내는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리는 대나무 그림을 일컫는다. 대나무는 매화[梅]·난초[蘭]·국화[菊]와 함께 사군자(四君子)라 하여 예로부터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 군자의 상징으로 애호되었다.
회화에서의 대나무는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부터 인물화의 배경으로, 또는 화조화(花鳥畵)나 수석화(樹石畵)의 한 요소로 그려졌음을 볼 수 있다. 묵죽이 언제부터 그려졌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당나라 후기 또는 오대(五代)라고 추측된다. 또 묵죽이라는 말이 중국의 미술사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006년에 쓰인 황휴복(黃休復)의 『익주명화록(益州名畵錄)』이다. 오대의 화가 손위(孫位)가 그린 벽화에 대한 내용에 ‘송석묵죽(松石墨竹)’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어 당시에는 묵죽이 따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큰 그림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다.
묵죽은 북송 때 사대부화(士大夫畵 : 문인화)가 대두함에 따라 하나의 독립된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북송의 문동(文同)과 소식(蘇軾)은 문인 묵죽화의 전통을 확립시켰다. 1120년 휘종(徽宗)의 어명으로 편찬된 『선화화보(宣和畵譜)』는 그때까지의 중국 회화를 주제별로 십문(十門)으로 분류해 정리하고 있다. 이때 묵죽이 그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게 되어 중국회화사상 독립된 화목(畵目)으로서의 위치가 굳어졌다.
원대(元代) 이르러 묵죽은 문인화가들에 의해 더욱 발달되었다. 특히 몽골족의 지배 하에서도 불굴의 정신을 지켜온 한족(漢族) 문인화가들 사이에서 지조의 상징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다가 명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매화·난초·국화와 더불어 사군자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부터 사대부들 사이에 묵죽화가 성행했음을 문헌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김부식(金富軾), 이인로(李仁老) 등이 대표적인 문인 묵죽화가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 또한 다른 고려시대의 묵죽화와 마찬가지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비록 독립된 그림으로서의 묵죽은 아니지만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던 불화 가운데 하나인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서 관음보살의 배경으로 설정된 대나무가 나타난다. 그래서 단편적이나마 당시 묵죽화의 경향 내지 양식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는 초기부터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을 채용하는 시험에서 대나무가 가장 등급 높은 화제(畵題)였던 것으로 미루어 사대부 화가들뿐 아니라 직업화가들도 묵죽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수문(秀文)이 1424년에 그린 『묵죽화책(墨竹畵冊)』(일본 개인 소장)은 현존하는 작품 중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예이다. 이 화책에 보이는 대나무들은 잎이 길고 큰 데 비하여 줄기는 가늘고 연약하다. 이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묵죽도(墨竹圖)」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양식과 상통한다.
조선 중기에는 이정(李霆)이 가장 대표적인 묵죽화가로 손꼽힌다. 그의 작품들은 조선 초기의 묵죽도와 다른 새로운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대나무 잎이 크고 줄기가 가는 것은 조선 초기 묵죽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으나 댓잎의 끝이 말렸다가 갑자기 가늘고 날카롭게 마무리되는 등 새로운 양식이 보인다. 또 가까운 대나무는 분명하게, 안개에 싸인 뒤쪽의 대나무는 은은하게 표현되어 화면의 분위기를 그윽하게 만들어준다. 이와 같은 화풍은 이정이 명나라 화가 하중소(夏仲昭)와 주단(朱端) 등의 묵죽화풍을 토대로 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는 문인 묵죽화의 전통을 계승한 대표적인 사대부 화가로 유덕장(柳德章)과 신위(申緯)가 활동하였다. 유덕장의 묵죽은 기본적으로 이정의 묵죽 화풍을 바탕으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설죽도(雪竹圖)」에 보이듯이 이정의 대나무 그림에 비해 댓잎 등이 날카롭고 예리한 것이 특징이다. 신위의 묵죽은 대나무 줄기가 유연하며 잎이 비교적 촘촘하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신위는 강세황(姜世晃)과 더불어 묵죽화에 자신들의 뛰어난 서예 솜씨로 시를 곁들여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을 이룬 문인 묵죽화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후기 화단에서는 묵죽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사군자를 많이 그렸다. 이는 당시 남종화(南宗畵)가 유행했던 추세와 연관이 있다. 또한 18세기 초 우리나라에 소개된 『개자원화전( 芥子園畵傳)』의 ‘난죽매국보(蘭竹梅菊譜)’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기에는 격동하는 정치적·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문화가 전반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사군자는 계속 문인화가와 직업화가들 사이에서 널리 그려졌다. 김정희(金正喜)의 제자 조희룡(趙熙龍)은 묵매·묵란·묵죽을 모두 잘 그렸다. 그의 묵죽은 줄기가 유난히 가늘고 잎이 세장한 독특한 양식을 보여 준다.
이 시기 또 다른 묵죽화의 대가로는 허유(許維),신위의 아들 신명연(申命衍), 민영익(閔泳翊), 그리고 김규진(金圭鎭)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김규진은 사군자뿐만 아니라 산수화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일본과 청나라에 다녀와 양국의 묵죽화 양식을 접할 기회를 가졌던 만큼 새로운 묵죽 양식을 이룩하였다. 그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왕죽(王竹)의 중간 부분과 바람에 심하게 나부끼는 잎을 배합해서 얻는 강하고 대조적인 화면구성을 들 수 있다. 김규진은 1915년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를 창설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는가 하면, 그의 호를 딴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상해(上海)에서 죽은 민영익은 그의 심경을 기탁한 많은 묵죽과 묵란의 걸작을 남겼다. 특히 그의 대나무는 대작이 많으며, 비백(飛白)이 군데군데 섞인 필획은 속도감과 탄력이 넘쳐 보인다. 이들 그림에서 그가 처하였던 암울한 시대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저항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