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영백(英伯), 호는 운초(雲樵). 충청남도 서천 출신. 최익현(崔益鉉)을 사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906년 1월 4일 최익현·민종식(閔宗植)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최익현은 4월 13일 태인(泰仁)에서 거의하기로 하고, 민종식은 4월 18일 홍산(鴻山)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였다.
문석환은 민종식 의진에 들어가 참모 겸 서기로 활약하면서 홍주성 함락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홍주성은 함락되고, 민종식은 피신하였다. 그러나 문석환은 82명의 동지와 함께 일본군에 잡혀 서울의 일본군사령부에서 심문을 받았고, 7월 74명은 석방되었으나 나머지 8명과 함께 유죄선고를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중 8월말 최익현과 임병찬(林炳瓚)이 뒤를 이어 대마도로 유배를 와서 이칙(李侙) 등 8명과 함께 최익현을 위로 격려하면서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면서 지냈다.
같은 해 11월 17일 최익현이 순절하자, 도집사(都執事) 임병찬, 부집사 이칙, 그리고 자신은 사서를 맡아 치상(致喪)하였다.
그 뒤 일제의 학대와 끈질긴 회유를 이겨내고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