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서울 출신이다.
1897년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의 정교(正校)를 지내고, 뒤에 춘천분견대에 전입, 1901년 특무정교가 되고 원주진위대에 전입되었다.
1907년 8월 일제가 원주수비대를 해산하려 하자 약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경찰을 습격, 3시간 동안 격전하였다. 그 뒤 의병부대를 소단위의 의병부대로 재편성하여, 제천·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쳐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강원도·충청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허준(許俊)·이경삼(李京三)·김만군(金萬軍)·고석이(高石伊)·김군필(金君必)·이한창(李韓昌)·한기석(韓基錫)·한갑복(韓甲復)·윤기영(尹起榮)·이강년(李康埏)·변학기(邊鶴基)·조인환(曺仁煥)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강년의 부대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에 대응해 일제는 3개 소대를 파견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07년 8월 12일 약 200명으로 편성된 부대로 여주를 기습하여 경무분견소를 포위, 공격하여 일본경찰과 가족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접수하였다.
이때 많은 지방민이 의병부대로 지원해 수 천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여주·이천·양근 일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8월 중순 이강년과 함께 충주 공략의 작전계획을 세우고 22일 행동을 개시하였다. 23일 충주를 공격해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점령하지 못하고 장호원으로 후퇴하였다. 이천 북방과 산지동(山地洞)에서도 격전을 벌였다.
9월 17일 약 600명을 2개 부대로 나누어 홍천을 습격하여 적에게 피해를 크게 입혔다. 9월 10일 약 200명의 의병이 재차 홍천을 기습하였다. 나머지 400명의 의병은 낭천군아(狼川郡衙)를 기습 공격, 총기와 탄약을 접수하였다.
9월 20일 춘천 남방의 정족(鼎足) 부근에서 약 300명의 의병들이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9월 23일 횡성군 봉복사(鳳服寺)에서 약 350명의 의병들이 일본군과 격전,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10월 26일 횡성 둔촌(屯村)에서, 11월 27일 홍천 서남 양덕원(陽德院)에서, 12월 8일 원주 동북 작곡(鵲谷)에서 계속 격전을 벌여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1908년 2월 29일 일본군과 접전했을 때, 의병 20여 명이 사살되고 민긍호는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해 탈출하려 하다가 사살되었다.
민긍호가 거느린 의병부대는 당시 강원도 일대에서는 가장 세력이 큰 부대였다. 강원도·충청도·경상도로 전전하면서 모두 1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