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되자, 민족 지도자들은 실력 양성 운동을 벌여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벌려 나갔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이 맨 처음 일어난 것은 한말이었다. 당시 윤치호(尹致昊) · 남궁억(南宮檍) · 박은식(朴殷植) · 양기탁(梁起鐸) 등이 600만 원을 모금하여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1운동 이후 다시 시도된 것이다.
운동은 1920년 6월 한규설(韓圭卨) · 이상재(李商在) · 윤치소(尹致昭) 등 100명이 조선교육회설립발기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모임에 참석한 인사들은 우리나라에 대학이 없음을 개탄하고 조속한 시일 내 민립대학을 설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 1월 이상재 · 이승훈(李昇薰) · 윤치호 · 김성수(金性洙) · 송진우(宋鎭禹) 등이 남대문통 식도원(食道園)에 모여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3일간에 걸친 총회를 개최하였다.
총회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 가장 선결 문제가 교육에 있으며, 문화의 발달과 생활의 향상이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에 있음을 선언하는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
계획서에 따르면 자본금 1000만원을 각출하되, 이를 3개년 계획으로 나누어 실행하는데, 제1차 연도에는 400만원으로 대지 5만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 대강당 1동을 건축하고, 법과 · 경제과 · 문과 · 이과의 4개 대학 및 예과를 설치하며, 제2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공과를 증설하고 이과와 기타 학과의 충실을 기하며, 제3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의과와 농과를 설치한다는 것 등이었다.
또 총회에서는 이상재 · 이승훈 · 조병한(曺炳漢) · 김탁(金鐸) 등 30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에는 지방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같은 해 4월 2일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가 소집되어 위원장에 이상재, 상무 위원에 한용운(韓龍雲) · 강인택(姜仁澤, 서무) · 유성준(兪星濬) · 한인봉(韓仁鳳, 회계) · 이승훈(사교) 등 9명을 선출하였다
한편, 별도로 지방순회선전위원 13명을 선정, 파견하였다. 그 결과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에 지방부가 조직되고 만주 간도 · 봉천(奉天), 미국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부가 확산, 조직되었다.
기성회는 ‘한민족 1000만이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금 모금에 나섰는데, 전라남북도에서만 15만원이 모금되었다. 그리고 경기도 안성의 이정도(李貞道)는 1년 동안 매일 아침 밥짓는 쌀에서 식구수대로 한 숟가락씩 모아 판 돈 19원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특히, 『동아일보』는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민중문화의 선구’, ‘최초의 가장 큰 민중운동’, ‘우리 민족의 생명운동이요 문화운동’이라고 극구 찬양하였다.
이와 같은 열기에 놀란 일제는 운동을 단순한 교육 운동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 판단하고 3단계의 탄압책을 강구하였다. 먼저 그들은 조선민립대학을 일본 국내의 사립대학의 분교로 부속시켜 발족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조선교육회는 1920년 8월 앞으로 설립될 조선민립대학은 일본 동경(東京) 사립 도요대학(東洋大學)의 분교로 발족할 것을 수락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일본의 「대학령(大學令)」에 분교 설치에 관한 조약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파기하였다.
두번째로 조선총독부에서는 1921년 9월 12일조선교육회 임원들을 초치하여 조선인 자제들의 교육을 위한 관립 종합대학의 설립에 관한 제1단계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조선의과대학으로 만드는 것이 첩경이라 하면서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중단할 것을 종용하였다.
만약, 민립대학을 세울 경우 조선인 학생뿐 아니라 일본인 학생도 수용하는 일선공학제(日鮮共學制)로 하자고 강권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교육회 임원들은 그 해 9월 26일 회원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임시 총회를 열고 총독부의 이와 같은 처사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일본 정부에 보내는 진정서와 민립대학 설립을 강행하겠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제3단계 탄압으로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는 한편, 민립대학에 관계 있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기금 갹출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22년 2월 「조선교육령」을 제정, 공포하였는데, 제12조에 따라 대학 설립 방침을 세우고 1923년 11월대학창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924년 5월 「경성제국대학관제」를 공포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예과(豫科)를 개설하고,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열어 학생을 모집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총독부에서는 민립대학기성회에 대해 강압적인 탄압을 노골화하기 시작하였다. 즉, 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은 민족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을 들어 이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인사들의 지방 강연을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고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연 중지를 명하고, 청중을 해산시켜 버렸다.
이와 같은 일제 총독부의 간악한 탄압이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실패의 주된 원인이었다. 그 외에도 1923년 여름 수재(水災)와 9월 일본 관동지방(關東地方)의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 공황, 1924년 남부지방의 한재(旱災)와 7월 전국적인 수재 인한 농촌 경제 파탄 등의 자연적인 여건도 민립대학설립운동에 불리한 조건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운동은 결국 일제의 간교한 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우리 민족에게 큰 의의를 가져다 주었다. 3·1운동 이후 전 민족이 실력 양성의 기치 아래 거족적인 조직체를 형성하여 민족 단결을 과시함으로써, 그 뒤에 전개되는 민족운동 양상에 있어서 조직적인 단체 결성의 표본이 되었다. 그리고 교육에 의한 민족 독립운동의 지표가 되어 교육 운동이 곧 민족 운동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하였다.
또한, 일제의 교육 정책에도 영향을 주어 경성제국대학 설립에 촉진제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전개된 민립대학설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즉, 1922년 교육령에 따라, 기독교 계통의 전문학교인 이화학당(梨花學堂)의 연합기독교여자대학(聯合基督敎女子大學)으로의 승격 운동이 있었으며,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 세브란스의학교 ·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가 연합하여 벌인 종합대학 설립 운동 등이 그것이다.
1926년 3월 서울 유지 20여 명이 민립대학기성회 재경 간부와 협의하여 재차 민립대학을 설립하고자 이종린(李鍾麟) · 박승철(朴勝喆) · 최원순(崔元淳) · 구자옥(具滋玉) · 한기악(韓基岳) · 안재홍(安在鴻) · 홍성설(洪性偰) · 이갑성(李甲成) 등이 대표 위원으로 선정되어 민립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총독부의 압력과 자금난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중앙집행위원이었던 이승훈은 1926년오산학교(五山學校)를 확장하여 농과대학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 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으로 좌절되었다.
한편, 민립대학기성회 회금보관위원이었던 김성수는 1931년 1년여에 걸쳐 구미 각국의 대학시설 운영 상황을 시찰하고 귀국하여 독자적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총독부의 한국인에 의한 대학설립 불인가라는 기본 방침을 알고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인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민립대학을 설립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이를 관철사키기 위해, 1940년보성전문학교의 대학 승격을 추진하였지만, 또 총독부의 허락을 받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결국, 1920년대 이래 우리 민족이 기도하였던 민립대학설립운동은 그때마다 좌절되어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이 땅에는 경성제국대학 외에는 단 한 개의 민립 또는 사립대학이 설립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