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신천(新川) 출생. 문필활동 이전의 경력은 알려진 바가 없다.
1930년대 초반부터 문필활동을 시작하면서 『동광(東光)』지에 시 「장날이 오면」(1932. 1.)을 발표했다. 이후 「고적(孤寂)한 산상」(1932. 2.)·「불사른 일기」(1933. 5.)·「유월송가(六月頌歌)」(1933. 6.)·「내가 여름밤을」(1933. 6.)·「농동(農童)아」(1934. 9.)·「촌락의 황혼」(1934. 9.)·「황새」(1935. 5.)·「약혼가」(1935. 9.)·「구걸」(1936. 12.)·「오월을 만지다」(1939. 5.)·「들놀이」(1939. 10.)·「대합실(待合室)」(1940. 9.) 등을 잇달아 내놓았다.
1940년에 신진시인들을 망라하여 펴낸 사화집 『신찬(新撰) 시인집』(시학사, 1940. 2.)에는 「가시덤불」·「풍류2제(風流二題)」·「달과 호궁(胡弓)」 등이 실려 있다. 그는 자연의 대상에 대한 시적인 인식의 폭을 넓혀 그것을 통한 인생의 좌표를 제시하고자 하는 시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털의 아름다움도/날개의 찬란함도 없이/네 혼잣 소리를/무엇이라 왜각왜각/적고 가벼운 날개들과는 섞이려고도 않으며(「황새」의 일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생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자연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 창작 이외에도 장편소설 「삼봉(三鳳)이와 도야지」(1935)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도 하였으며 평론으로는 「여수(麗水) 박팔양(朴八陽) 선생께 드림」(1937. 4.)·「이은상론(李殷相論)」(1937. 4.) 등이 있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시부위원회에 소속되어 창작활동을 전개하였고, 광복 직후 월북하여 평양의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