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아버지는 민지생(閔智生)이다.
정종 초 봉상시협률랑(奉常寺協律郞)으로 재직하다가 정희계(鄭熙啓)의 시호 문제와 관련,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1404년(태종 4) 지평(持平)·호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408년 정랑으로 재직 중 좌랑 장안지(張安之)의 전지개량절급(田地改量折給)을 둘러싼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428년(세종 10) 첨지돈녕부사·동지돈녕부사를 거쳐, 같은 해 진하사(進賀使) 일행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0년 함흥부윤으로 영흥부 군기고 화재사건을 다루었다.
이때 관련자에 대한 지나친 처벌로 직첩을 박탈당하고 경기도 여흥부(驪興府)의 요간(燎干: 봉수나 관서에 불을 놓는 군역자)으로 보충되었다. 그 뒤 1434년 동지돈녕부사·전라도관찰출척사, 이듬해 중추원부사·호조참판, 1436년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그 뒤 고신(告身)을 빼앗겼다가 1441년 환급되었고, 1460년(세조 6)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