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욱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석계집』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회수(晦叟)
석계(石溪)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9년(명종 14)
사망 연도
1625년(인조 3)
본관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석계집』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회수(晦叟), 호는 석계(石溪). 영동(永同)에 살았다. 아버지는 참봉 민반(閔泮)이다. 박사종(朴嗣宗)·조헌(趙憲)·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임진왜란 중 할머니와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렀으며, 조헌이 순국하자 호서(湖西)의 사인(士人), 금산의 기로(耆老)들과 의논하여 조헌의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또, 회곡(晦谷)에 서원을 세워 박연(朴堧)과 박사종을 제향하였다.

그 뒤 김장생의 문인이 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스승 김장생과 함께 선비들을 동학사(東鶴寺)에 모이도록 하여 폐모론이 잘못임을 주장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부근의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공주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왕을 모셨다. 이후 선비들과 함께 덕업계(德業稧)를 조직하여 남전(藍田)의 향약(鄕約)과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을 실시하였다. 이시직(李時稷)·김집(金集)·송방조(宋邦祖)·송갑조(宋甲祚)·송시영(宋時榮)·이대유(李大유)·조정호(趙廷虎) 등과 교유하였다. 1707년(숙종 33) 효행으로 공조좌랑(工曹佐郎)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석계집(石溪集)』이 있다.

참고문헌

『석계집(石溪集)』
『대동야승(大東野乘)』
『영동읍지(永同邑誌)』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