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회수(晦叟), 호는 석계(石溪). 영동(永同)에 살았다. 아버지는 참봉 민반(閔泮)이다. 박사종(朴嗣宗)·조헌(趙憲)·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중 할머니와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렀으며, 조헌이 순국하자 호서(湖西)의 사인(士人), 금산의 기로(耆老)들과 의논하여 조헌의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또, 회곡(晦谷)에 서원을 세워 박연(朴堧)과 박사종을 제향하였다.
그 뒤 김장생의 문인이 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스승 김장생과 함께 선비들을 동학사(東鶴寺)에 모이도록 하여 폐모론이 잘못임을 주장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부근의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공주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왕을 모셨다. 이후 선비들과 함께 덕업계(德業稧)를 조직하여 남전(藍田)의 향약(鄕約)과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을 실시하였다. 이시직(李時稷)·김집(金集)·송방조(宋邦祖)·송갑조(宋甲祚)·송시영(宋時榮)·이대유(李大유)·조정호(趙廷虎) 등과 교유하였다. 1707년(숙종 33) 효행으로 공조좌랑(工曹佐郎)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석계집(石溪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