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예술무대(民族藝術舞臺)는 광복 직후에 좌익과 대결하기 위하여 우익 민족진영 연극운동의 기수로서 1945년 10월에 극작가 이광래(李光來)을 중심으로 창단되었다. 보통 ‘민예(民藝)’로 불렸다. 극단 단원으로는 전두영(田斗永)·이향(李鄕)·최남현(崔湳鉉)·황종금(黃鍾今)·안민(安民)·임사만(任士滿)·한은진(韓銀珍)·최승이(崔承伊)·황정순(黃貞順)·김정자(金貞子)·유계선(劉桂仙) 등이 있었다.
민예는 순수연극과 상업연극의 중간을 지향하였던 극단으로서 좌우익 연극이 극심한 분열상을 보일 때, 반공노선을 견지하고 신탁통치반대운동에도 앞장 선 단체였다.
이 극단은 창립공연으로 1946년 1월 16일 중앙극장에서 톨스토이 원작·김형윤(金亨潤) 각색, 이광래 연출 「카츄샤」(부활)을 무대에 올렸다. 제2회 공연으로는 2월 9∼15일까지, 역시 중앙극장에서 김동인(金東仁) 원작·이광래 각색·연출, 채남인(蔡南仁) 미술 「젊은 그들」을 공연하였다.
그 뒤 8월에 이광래 작·연출의 「청춘의 정열」을 단성사(團成社)에서, 1948년 4월 19∼23일까지 역시 이광래 작·연출로 「민족의 전야(前夜)」를 시공관 무대에서 공연하였고, 6월 문교부 주최 제1회 전국연극콩쿨에 「백일홍 피는 집」으로 참가하였다.
1950년 1월 남혜성(南惠星) 작·연출의 「정의자(正義者)」와 방인근(方仁根) 작·남혜성 연출의 「마도(魔都)의 향(香)불」을 각각 5, 6회 공연으로 무대에 올린 뒤 활동이 쇠퇴하였다.
극단 민예를 이끌던 이광래가 국립극장 직속의 신극협의회(新劇協議會)주 01) 간사장을 맡으면서 해산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