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호는 청구자(靑丘子)·죽리(竹里).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으로 부사과(副司果)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711년(숙종 37)부터 1712년까지 통신사행의 수행화원으로 정사(正使)인 조태억(趙泰億)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에 「수묵산수(水墨山水)」와 「맹호연방매도(孟浩然訪梅圖)」 등을 남겼으며, 이 작품들에 썼던 조태억(趙泰億)과 이방언(李邦彦)의 찬문이 『고화비고(古畵備考)』의 조선서화전에 전한다. 특히, 일본에 남긴 그의 회화는 당시 일본 남종화(南宗畵)의 선구자로 우리나라 사신 접대에 공이 컸던 기온 난카이(祗園南海)의 묵매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또한, 초상을 잘 그려 함세휘(咸世輝), 양기성(梁箕星)과 함께 영조어진을 도사하였으며, 1735년(영조 11)장득만(張得萬)과 함께 세조어진을 도사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많지 않으며 개인소장의 「묵매도(墨梅圖)」 두 폭이 잘 알려져 있다.
이 두 폭의 매화나무 그림은 나뭇가지가 심하게 뒤틀린 필획이 변칙적이고 기괴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구도나 매화꽃의 표현 등은 기본적으로 어몽룡(魚夢龍), 허목(許穆) 등에 의하여 우리나라 묵매법이 형성된 조선 중기의 화법을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