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춘당(春塘). 아버지는 박안경(朴安敬)이다.
일찍이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1454년(단종 2)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권지학유(權知學諭)로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어 1자급이 더하여졌다. 그 뒤 세조가 여러 차례 영직으로 탁용하려 하였으나 관계를 떠나 함양(咸陽)에 은거하여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세조가 죽자 다시 벼슬길에 올라 1474년(성종 5) 평사(評事)가 되었다. 이때 북변(北邊)의 병마사인 어유소(魚有沼)의 명으로 왕에게 대전(大箭)과 매와 사냥개를 바쳤다.
이어 왕에게 육진(六鎭) 개척 이후 야인(野人)들의 내조(來朝)가 무질서해지면서 조선이 입는 피해가 커졌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 대책으로 야인들의 내조 시 운(運: 군대 대오의 단위나 화물 운송 때의 한 묶음)의 1년 총수와 한 번의 운이 이동할 때의 수를 규정하도록 건의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그 뒤 훈도(訓導)·교리·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 함양의 구천향현사(龜川鄕賢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