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고종 30)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여 서울에 올라가 상소를 올린 봉소인(奉疏人) 중 1인이다. 이해 제2차 보은집회가 보은장내에서 있자 옥천의 교도 1,000명 이상을 인솔, 참가하여 옥의대접주(沃義大接主)가 되었다.
이듬해 남접의 전봉준(全琫準)이 무장(茂長)에서 봉기하였을 때에는 교도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노력하였고, 9월 북접군이 봉기할 때는 유병주(柳炳柱)와 함께 옥천에서 기포(起包)하였다.
그러나 관군과의 교전에서 청주병사 이장회(李章會)에게 크게 패하였지만, 북접의 주력군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청주진위대 병사를 기습, 70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고, 생포한 5명은 물침표(勿侵標)를 주어 돌아가도록 하였다.
북접군이 금구(金溝)에서 대패하여 영동으로 철수할 때 함께 행동하였으며, 북접군이 무극을 거쳐 충주에서 해산할 때까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