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주 출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 아버지는 박형(朴珩)이며, 어머니는 예안 김씨(禮安金氏)로 김만일(金萬鎰)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예문관·승정원·홍문관 등에서 여러 청환직(淸宦職: 조선시대 홍문관·규장각·선전관청 등의 벼슬. 지위나 봉록이 높지 않으나 후에 중용될 자리)을 역임하고, 정자(正字)로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옥당(玉堂: 조선 시대 홍문관을 달리 이르는 말)에 있을 때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군학(君學)과 시무(時務)에 대한 충언을 담은 1만여 자나 되는 상소를 올려 정책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어서 수찬에 승진되고, 이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 박승임의 명망이 높아지자 당시 세도가인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의 심복으로 악명이 높았던 진복창(陳復昌)이 그를 농락할 목적으로 만나보기를 청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으며, 그 뒤 소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47년(명종 2) 예조정랑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이듬 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귀향하였다. 상복을 벗은 뒤에는 현풍현감이 되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1557년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윤원형의 세도가 더욱 심해져 벼슬에서 은퇴하여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힘썼다.
이듬 해 풍기군수로 다시 임명되어 치적을 쌓았고, 임기가 만료되어 교감(校勘)에 임명하려 했으나 사양하였다. 그 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임명되었고, 판교(判校)를 거쳐 1565년 병조참의에 승진되고, 이듬 해 동부승지로 전직되었다가 얼마 뒤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569년(선조 2) 동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1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 해 좌승지에 임명되었다.
1573년 도승지에 승진되었으며, 이듬 해 경주부윤이 되었다. 이때 집경전(集慶殿)에 태조의 영정을 봉안했는데, 사람들이 함부로 문을 열어보는 등 예절을 지키지 않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봉심(奉審: 왕명을 받들어 능이나 묘를 보살피는 일)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출입을 엄금하였다. 또한 경주 일대의 묵은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관비를 충당하였으며, 조세를 감면하고 부역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576년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강화부유수·여주목사를 거쳐 1581년 춘천부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83년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언사(言事)에 연루되어 왕의 뜻에 거슬려 창원부사로 좌천되었으며, 얼마 뒤 중앙에 소환되었다가 병사하였다.
박승임은 풍채가 뛰어나고 과묵했으며, 항상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하였다.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많은 서적을 읽었고, 특히 『논어』와 주자서(朱子書)를 탐독하였으며,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기록해 두었다가 스승인 이황에게 질문하여 실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시문에 능하여 한때 많은 시를 지었지만, 중년 이후로는 사람을 천박하고 경솔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이를 중지하고 심학(心學)에 주력하며 실천적 수행에 힘썼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이에 관한 여러 선현들의 설을 모아 책으로 엮어내는 등 저술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성리학적 견해는 주로 이황의 학설을 따라 주리론(主理論)의 경향을 보였다.
저서로는 『성리유선(性理類選)』·『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강목심법(綱目心法)』·『소고문집(嘯皐文集)』 등이 있다.
경상북도 영주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