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헌(仲憲), 호는 죽창(竹窓)·용탄산인(龍灘散人). 아버지는 진사 박욱(朴有+彧)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이광림(李光林)의 딸이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3년(현종 4)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제수받고 의금부도사·감찰·공조좌랑을 거쳐, 1666년에 청안현감(淸安縣監)을 지냈다.
1672년 전적(典籍)·병조정랑을 거쳐 1673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이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면서부터 지평 네 차례, 정언 세 차례를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남인에 의하여 곤경에 빠진 송시열(宋時烈)을 변호하다가 죄를 얻어 청주도사(淸州都事)로 좌천되고, 뒤에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옮겼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승진하여 지평·병조정랑·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1683년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곳을 할읍(割邑: 읍을 나눔)하여 새로이 무산부(茂山府)를 설치하려고 백성으로부터의 역역(力役: 몸으로 일을 하는 국가의 역)을 빈번히 징발하였는데, 이때 박원도는 마포(麻布) 3,000필로써 고마(雇馬: 민간에게서 말을 빌려씀)하여 백성의 부담을 크게 완화시켰다.
1684년 장례원판결사, 그 뒤 형조참의·우부승지·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거쳐, 자청하여 부평현감으로 나아갔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불출하면서 독서로 생애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