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응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홍문관수찬, 사간원헌납,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정길(正吉)
읍백당(挹白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89년(선조 22)
사망 연도
1645년(인조 23)
본관
밀양(密陽)
주요 관직
홍문관수찬|사간원헌납|사헌부지평
관련 사건
인조반정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홍문관수찬, 사간원헌납,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정길(正吉), 호는 읍백당(挹白堂). 박계현(朴啓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안세(朴安世)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이며, 어머니는 김사원(金士元)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3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및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친 뒤 1617년에는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고 1618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이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론이 대두되자 신병을 핑계로 불참한 이유로 이듬해 고산현감(高山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20년 영광군수를 거쳐, 그 뒤 홍문관수찬·정자(正字)·교리·응교(應敎) 및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는 제주로 유배되고, 이재영(李再榮) 등의 공사(供辭: 심문조서)에 의하여 박자응의 급제가 차술(借述: 남의 글을 빌려서 서술함)임이 밝혀지자 삭과(削科: 과거 합격자 등록에서 삭제)되었다. 1628년(인조 6) 진도로 이배된 뒤 이듬해 위리(圍籬: 죄인의 유배장소를 가시 울타리로 둘러치던 것)만 철거되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응천일록(凝川日錄)』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