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청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전기 판공안부사, 지의정부사, 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시호
익위(翼魏)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57년(공민왕 6)
사망 연도
1423년(세종 5)
본관
영해(寧海: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
주요 관직
판공안부사|지의정부사|판한성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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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전기 판공안부사, 지의정부사, 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영해(寧海). 황희석(黃希碩)의 가인(家人)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내시로 출사해 낭장(郞將)에 오르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중랑장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입직군사(入直軍士)로 궁문(宮門)을 지킬 때에 왕제(王弟) 의안대군(義安大君)이 들어가려 하자 왕명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의안대군이 발길로 차며 상처를 입혔는데도 끝내 거절하였다. 태조가 이 사실을 알고 은대(銀帶)를 하사해 내상직(內上直)에 임명하고 어전 밖을 지키도록 하였다.

철야로 직무에 충실해 선공감소감(繕工監少監)이 되고, 1396년(태조 5) 호익사대장군(虎翼司大將軍)으로 동북면선위사(東北面宣慰使)가 되어 오랑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불러 타일렀다. 1402년(태종 2) 공조·예조전서, 1406년 중군총제 겸 선공감사(中軍摠制兼繕工監事)가 되었는데, 토목공사의 감독 업무를 잘 수행한 공으로 현달한 관직에 발탁될 수 있었다.

문묘(文廟)를 새로 지을 때 역사의 감독을 맡아 주야로 살피고 계획해 4개월 만에 완공시켰다. 그러나 모화관(慕華館)을 남지(南池)에 닿게 하는 작업은 시일만 끌고 완성하지 못해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1408년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공조판서를 역임할 때 제릉(齊陵)과 건원릉(健元陵)의 공사를 감독하였다. 1413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경성수보도감제조(京城修補都監提調)를 맡아 도성을 수축하였다.

그 뒤 좌우군도총제(左右軍都摠制), 1415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내고, 1419년(세종 1)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이르렀다. 이 해 인정문(仁政門) 밖의 행랑 축조를 감독했으나 측량 실수로 기울어지자 직무 태만으로 하옥되기도 하였다. 성품이 각박하고 인정이 적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익위(翼魏)이다.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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