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해(寧海). 황희석(黃希碩)의 가인(家人)이다.
내시로 출사해 낭장(郞將)에 오르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중랑장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입직군사(入直軍士)로 궁문(宮門)을 지킬 때에 왕제(王弟) 의안대군(義安大君)이 들어가려 하자 왕명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의안대군이 발길로 차며 상처를 입혔는데도 끝내 거절하였다. 태조가 이 사실을 알고 은대(銀帶)를 하사해 내상직(內上直)에 임명하고 어전 밖을 지키도록 하였다.
철야로 직무에 충실해 선공감소감(繕工監少監)이 되고, 1396년(태조 5) 호익사대장군(虎翼司大將軍)으로 동북면선위사(東北面宣慰使)가 되어 오랑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불러 타일렀다. 1402년(태종 2) 공조·예조전서, 1406년 중군총제 겸 선공감사(中軍摠制兼繕工監事)가 되었는데, 토목공사의 감독 업무를 잘 수행한 공으로 현달한 관직에 발탁될 수 있었다.
문묘(文廟)를 새로 지을 때 역사의 감독을 맡아 주야로 살피고 계획해 4개월 만에 완공시켰다. 그러나 모화관(慕華館)을 남지(南池)에 닿게 하는 작업은 시일만 끌고 완성하지 못해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1408년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공조판서를 역임할 때 제릉(齊陵)과 건원릉(健元陵)의 공사를 감독하였다. 1413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경성수보도감제조(京城修補都監提調)를 맡아 도성을 수축하였다.
그 뒤 좌우군도총제(左右軍都摠制), 1415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내고, 1419년(세종 1)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이르렀다. 이 해 인정문(仁政門) 밖의 행랑 축조를 감독했으나 측량 실수로 기울어지자 직무 태만으로 하옥되기도 하였다. 성품이 각박하고 인정이 적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익위(翼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