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여길(汝吉), 호는 천휴(天休). 할아버지는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박황(朴潢)이고, 아버지는 박세남(朴世楠)이며, 어머니는 예조참판 이행진(李行進)의 딸이다.
1673년(현종 14) 진사로서 반궁(泮宮: 성균관의 다른 이름)에서 시행된 제술(製述)에서 일등을 해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할 수 있었다. 같은 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도당(都堂: 의정부)의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수찬·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의정부의 제2차 기록)에 올랐다.
1680년(숙종 6) 영남의 염문사(廉問使)가 되었으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있을 때 사회 개혁에 대한 칠조(七條)의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조좌랑을 거쳐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송시열(宋時烈)과 박세채(朴世采) 등 재외(在外) 선비들을 다시 부르기를 청하였다.
이조정랑·사간·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의 부응교(副應敎)·응교를 거쳐, 1685년 승지에 특별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688년 대사성으로 시관(試官)이 되어 과제(課製)의 글제를 『장자(莊子)』 어부편(漁父篇)에서 내었다. 그리하여 선왕조부터 과장에서 금지시켜온 노자·장자의 말에서 과제를 냈다해 헌납 김성적(金盛迪)으로부터 추고(推考)를 당하였다.
이조참의를 거쳐 1689년 하지사(賀至使)의 부사(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고, 승지로 있으면서 국왕을 보필하는 발언이 숙종의 노여움을 사 그 해 먼 곳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에 승지 윤이도(尹以道)·이동욱(李東郁)의 요청에 의해 작위가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