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화학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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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초 · 중등과정의 사립학교.
내용 요약

배화학당은 1898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이다. 1898년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부의 캠벨 선교사가 캐롤라이나학당으로 설립하였다. 규모는 단급(單給)으로 교사는 여교사 2명이었고, 교과목도 국문과 한문에 국한되었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교명을 개칭하였다. 1910년 배화학당에 교사로 부임한 남궁 억은 8년간 재직하면서 학생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저항하면서 폐교 위기에도 놓였다. 1951년 이후 현재의 배화여자중학교와 배화여자고등학교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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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98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초 · 중등과정의 사립학교.
연원 및 변천

1898년 10월 기독교 전파와 여성교육을 목적으로 미국 남감리회(南監理會) 여선교부의 캠벨(Josephine P. Campbell) 선교사가 한성 인달방 고간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 교사를 마련하고 캐롤라이나학당으로 설립하였다. 캠벨은 우리나라에 내한한 최초의 여선교사였으며, 학당의 이름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아이들이 낸 선교기금이 학교 설립 자금으로 일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는 뜻에서 칭해졌다.

당시 발간된 『여학교사(女學校史)』 · 『여학교지(女學校誌)』에 의하면 다른 근대 여학교와 마찬가지로 배화학당 역시 초창기 학생 모집과 학교 운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최초의 학생은 두 명의 여학생과 세 명의 남학생이었는데, 두 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은 미국 남감리회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리드(C. F. Reid)의 사택에서 수위를 보던 박(朴)씨의 딸이었다.

또한 캠벨이 학당의 기숙사를 돌아볼 때면 어린 탓에 이부자리 위에 오줌을 지린 학생도 있곤 하였다. 처음에는 학교라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단급(單給)으로 교사는 2명뿐이었고, 교과목도 국문과 한문에 국한되었다.

이후 1902년부터 기숙사생 이외에 통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여 학생 수가 30명으로 증가하였다. 1903년 남감리교회 여선교부에서 경비를 증액하여 교사(校舍)와 기숙사를 증축하면서 중학교 예비과를 설치하였고, 1910년 4월 2일 배화학당으로 교명을 개칭하고, 4년제의 중학과와 4년제 소학과를 병설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사는 모두 여선교사들이었는데, 이는 당시 남녀유별의 풍속에서 여자가 남자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한문 담당만은 남자 선생이 맡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남자 선생은 여학생을 마주 보고 가르치지 못하고, 항상 뒤로 돌아앉아 여학생이 묻는 것에만 대답을 해주거나 교사와 학생 사이에 병풍을 치고 수업이 진행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교육구국의 일념으로 교육 현장에 뛰어들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1910년 10월 배화학당에 교사로 부임한 한서(翰西) 남궁 억(南宮檍)이었다. 남궁 억은 배화학당에서 8년 동안 재직하면서 여학생들에게 남학생 못지않은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특히 배화학당의 교가를 작사하고, 여학생들에게 무궁화 13송이로 우리나라 지도와 태극기를 수놓게 하였다. 그 후 이 무궁화 수본과 태극기 수본은 차츰 우리나라 각 가정에 보급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일조하였다. 3 · 1운동 때 배화학당 학생들의 활동이 컸던 것은 남국 억의 민족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 개편되었다.

일제가 주1를 강요하자 배화고등여학교를 비롯한 기독교계 학교는 이에 저항하였고, 계속되는 일제 당국의 탄압에 1940년 선교사들 대부분이 본국으로 철수함에 따라 배화고등여학교도 심한 경영난에 봉착하면서 폐교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관리들은 매일같이 배화고등여학교에 드나들면서 유지재단을 설치하지 못하겠거든 경영권을 포기하라고 압박했고, 이에 교사로 있던 이덕봉(李德鳳)과 이만규(李萬珪)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여성 독지가 이민천(李閔天)이 춘천 · 이천 · 연기 · 익산 등지에 있는 전답과 대지 등 토지 106만 6,820㎡(32만 1,723평)을 기부함으로써 배화고등여학교는 폐교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43년 배화여자소학교를 경성여자배화학교로 개칭하였으나, 1945년 9월 경성여자배화학교를 폐교하고 재적생은 종로국민학교에 배속시켰다. 배화고등여학교는 1946년 배화여자중학교로 개편되고, 이어서 1951년 8월 배화여자중학교와 배화여자고등학교로 분리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 근대교육의 형성』(김경미, 혜안, 2009)
『배화 100년사』(배화여자고등학교, 1998)
『한국개화교육연구』(손인수, 일지사, 1980)
『한국근대교육사』(손인수, 연세대학교출판부, 1971)
「남궁억의 여성교육사상에 관한 연구-배화학당 시절을 중심으로-」(송준석, 『한남교육연구』2, 1994)
배화여자고등학교(http://www.paiwha.hs.kr)
주석
주1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우리의 종교와 사상 자유를 억압하기 위하여 신사에 배례하도록 강요하던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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