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구전투 ()

고대사
사건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군이 주체가 되어, 일본의 지원병과 합세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과 벌였던 국제적인 싸움.
이칭
이칭
백강구전(白江口戰), 백강전쟁(白江戰爭)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군이 주체가 되어, 일본의 지원병과 합세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과 벌였던 국제적인 싸움.
개설

일명 ‘백강구전(白江口戰)’·‘백강전쟁(白江戰爭)’이라고도 한다.『구당서(舊唐書)』·『삼국사기』에는 ‘백강구(白江口)’라 했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촌강(白村江)’이라 하였다.

이곳이 지금의 어디인가는 아직 정설(定說)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종래의 연구가 그러했듯이 백강구전쟁의 종합적인 연구가 모아지는 것으로 진전된 것이 아니고, 일본의 전적지(戰跡地)를 찾는 데만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기에는 거의 음성학적으로 위치를 비정하다 보니 많은 지명이 등장하는 혼란만 낳고 말았다.

이러한 점에서 백강구전의 현장을 찾는데 기준이 되어야 할 몇 가지 점은 ①일찍부터 일본과의 교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곳, ②당나라 수군(水軍)이 백제로 진입하는 데 있어 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국토수호의 길목인 곳, ③웅진강(熊津江)에서 주류성(周留城)에 가까운 곳 등이다. 현재까지 유리한 곳으로는 ①군산포(群山浦), ②금강(錦江), ③동진강(東津江), ④홍성(洪城), ⑤부안(扶安) 등의 설이 있다.

이들 지명이 근대에 와서 부각되는 이유는 전쟁 앞에 붙이는 단순한 고유명사에서가 아니라 일본사람들에 의해 특수명사로 전도되어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사에서는 아직도 고유명사화된 개념으로 수용되지 못하였다. 이렇게 백강구전은 백강구라는 지명에 전쟁이라는 보통명사를 붙인 것에 지나지 않으나,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탈과 함께 가야의 실지회복(失地回復)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골격을 맞추는 데 사용된 특수개념으로 반영되었다.

경과

당시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이를 지원(조병)하기 위한 결단은 일본 내부의 지배세력이 친백제계(親百濟系)로 전환했을 때 이루어졌다. 그들이 동맹국에 행했던 파병은 고래로부터 연계(連繫) 결속된 특수관계에 있었던 백제에 대한 귀소성적(歸巢性的)인 행위로 볼 수 있는 일면도 있다.

그러나 종래의 연구가 일방적으로 관계기록만을 믿어 당시 국제관계의 추이를 파악하는 데 다소 장애요인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즉, 일본중심의 원정군 파견이라는 일면에다 각색을 했던 바, 이것은 전대(前代)의 4∼5세기 고대 한일관계에서 문제되는 것과도 유사하다. 그 내용은 일본이 파견한 지원병이 백강에 당도해 당나라 군대와 당당히 맞상대로 싸웠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①그들의 국제적 지위가 당시 당나라와 서로 비견되는 강국(强國)이라는 것. ②백제를 보호하는 후견국(後見國)의 입장에서 경사적(傾斜的)인 상국(上國)에 있었다는 것. ③신라의 영토확장에 의해 가야를 상실했던 이른바 남한경영지(南韓經營地)를 다시 구축하기 위한 계기를 이들의 군사행동에 맞추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철수와 재탈환이라는 사이클(cycle)로 날조하는 데 이용했던 것 등이다.

더욱이 백강구전을 이른바 당시의 국제전쟁으로까지 격상시켜 부르기를 즐겨 하였다. 국제전쟁이란 참전국의 다수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일본사(日本史)에서 남북대립의 개념을 적용하면서 이 전쟁의 해석을 미화시켰다. 당시 일본은 당나라와 비교될 수도 없는 작은 세력인데도 국제적인 위치 상정을 당나라와 대항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일당전쟁(日唐戰爭)’으로 꾸몄다.

그리하여 백강구전 발단의 역사적 배경을 현 무문정변(武門政變)→당 태종(太宗)의 유조(遺詔)까지로 넓히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대륙문화를 직접 수용하는 통로를 주장하는 것과도 일치하는 논리이다. 이와 같이 백강구전을 당시 국제전쟁으로 승격해 부른 것은 당나라의 대립세력이 일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의 국제관계에서의 역할을 거의 일본중심으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잘못된 시각이다.

왜군의 출병은 한반도 형세에 대한 판단에 기초를 둔 것이다. 간접적인 지원으로는 당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백제의 부흥운동 세력이 진압되면 왜군은 더 이상 한반도에 손을 내밀 기회가 없어질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출병을 결정한 것이다. 663년에 이르러 왜국이 비로소 백제에 출병한 것은 완전히 왜국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여 결정한 것이지, 진심으로 백제 부흥운동을 지원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왜국은 한반도가 당의 영향 하에 들어가는 것은 곧 일본열도에 대한 위협이라는 생각에서 백강구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일본의 군사적 원병에 대한 경위는 일본사료에 비교적 상세하다. 이들이 국가의 정규군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인원은 세 차례에 걸쳐 총 4만여 명의 대규모였다. 이들이 백강에 도착해 정박하고 있었던 때부터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인다. 이들이 당도한 것은 663년이다.

백제 멸망 후 663년 무왕의 종자(從子) 복신(福信)이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을 본거지로 삼아 백제부흥병을 일으키고자 할 때 먼저 왜(倭)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 때 이미 왜에 질자(質子)로 파견되었던 왕자 부여 풍(扶餘豊)이 귀국함으로써 자못 그 세력이 한 곳, 즉 백제부흥에 모였다. 그리하여 부흥군은 백제의 북서부일대가 중심이 되어 유인원(劉仁願)의 부대를 포위하였다.

결과

백제부흥군의 공격에 당황한 당나라는 증원군으로 웅진도독(熊津都督)인 유인궤(劉仁軌)로 하여금 신라군과 연합전을 펴게 하여 전운이 감돌게 되었다. 백강구전은 광의로 백강구에서의 교전과 퇴로에까지 전개된 주류성(周留城)싸움을 포함한다. 주류성은 당시 민중봉기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신라의 육군과 정기(精騎)가 투입되어 이를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유인궤(劉仁軌), 별수 두상(別帥 杜爽)과 부여 융(扶餘隆)은 수군(水軍)을 이끌고 주류성으로 향하던 중에 왜선(倭船)을 백강에서 만나 네 차례의 교전을 치렀는데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이 때의 전과는 왜선 400척을 불태웠고, 침몰하면서 내뿜은 연기와 불기둥이 하늘을 온통 덮고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나당연합군으로부터 협공된 해전에서 백제는 급히 정기를 파견해 백강의 안상(岸上)에서 왜선을 수비했지만 당나라의 뛰어난 해전술에 밀려 일격에 대참패를 당하였다.

한편, 백제의 부흥운동은 부여 풍을 맞아 영군장군(領軍將軍) 도침, 상잠장군(霜岑將軍) 복신을 중심으로 조직을 갖추었으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는 내홍(內訌)이 일어나자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무너져갔다. 부여 풍이 고구려로 도주하자 지수신(遲受信)은 임존성(任存城)에 의거해 계속 저항하였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백강구전의 기사는 신라의 전승과 더불어 부상되고 있지만 실제로 백제의 저항도 여기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의의와 평가

신라는 이 전쟁 후 당나라와 충돌하게 되었으나 이를 적절히 조정하면서 삼국통일(三國統一)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일본은 애당초 그들의 문화수입과 대륙교통에서 백제의 기반이 그대로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지막 소망도 이루지 못함으로써 이후 대외정책이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또 일본의 정치지도는 신라가 백제를 대신해 진출하였다.

백강구전투는 일본의 야마토정권(大和政權)의 정신적·문화적인 향백제(向百濟)에로의 귀소성적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백제파병은 당시 일본 국내문제의 돌출구를 대외로 전환하는 권력연장 위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며, 여기에는 대외관계와 더불어 사회·문화적인 수요와 결합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통감(東國通鑑)』
『구당서(舊唐書)』
『일본서기(日本書紀)』
『백제 멸망의 진실』(양종국, 주류성, 2004)
『백제 부흥운동사』(노중국, 일조각, 2003)
『백강구전쟁(白江口戰爭)과 백제·왜관계(百濟·倭關係)』(변인석, 한울, 1994)
「7세기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특집논문:7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왜국의 대한정책(對韓政策)-」(연민수, 『신라문화』24,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4)
「백강구전쟁을 통해서 본 고대 한일관계의 접점-백강 백강구의 역사지리적 고찰을 중심으로」(변인석, 『동양학(東洋學)』24, 1994)
「백강구전(白江口戰)의 서설적 고찰(序說的 考察)」(변인석, 『부산사총(富山史叢)』1, 1986)
「칠세기중엽 백강구전(七世紀中葉 白江口戰)의 연구사적 검토(硏究史的 檢討)」(변인석, 『부산사총(富山史叢)』2, 1986)
『白村江』(遠山美都男, 講談社, 1997)
『白村江の戰いと任申の亂』(小林惠子, 現代思潮社, 1988)
『白村江』(鬼頭淸明, 敎育社, 1981)
『白村江』(鈴木治, 學生社, 1975)
「百濟救援の役後の日唐交涉」(鈴木靖民, 『續日本古代史論集』上, 1972)
『百濟の役』(八木充, 小葉田淳退官記念國史論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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