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곡지 ()

근대사
문헌
한약우가 경상남도 진주 백곡리 마을에 관하여 기록한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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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한약우가 경상남도 진주 백곡리 마을에 관하여 기록한 역사서.
개설

1책(19쪽). 필사본. 마을지라고 할 수 있지만, 체제와 내용이 부실하다.

편찬/발간 경위

필자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동학농민전쟁의 여파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짐작된다.

백곡에서는 1892년 허물어져 가던 국가와 향촌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진유(眞儒)들이 향촌 주민을 이끌겠다는 뜻에서 먼저 강안(講案)을 정하고 절목(節目)을 만들었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강안을 만든 것이 아니라 경상감사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내용

그 절목은 강회(講會)의 임원, 강회하는 날, 강하는 교과서, 강회의 질서와 비용 등 모두 25개조이다. 그리고 1894년 가을에는 동학농민군을 막기 위해서 이약(里約)도 만들었으며, 1895년 3월에는 다시 동안(洞案)을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뒤에는 동학의 발생과 전파, 동학농민전쟁 당시의 상황을 적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더라도 중요한 사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즉, 당시 진주 근방의 유력한 동학 지도자였던 백낙도(白樂道)가 동경대전(東經大全)으로 제자를 가르쳤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동학주문을 외우고 닭 등 기피하는 음식이 있다는 등 동학교도의 신앙 행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동학이 널리 퍼지게 된 원인을 간략하지만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상민도 입도(入道)만 하면 양반과 같은 지위가 되므로 대거 동학으로 들어갔고, 관리들의 학정은 상민뿐만 아니라 양반까지도 입도하게 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부자들의 토지겸병이 특히 심했으므로 부자를 억누르고 빈민을 돕는다는 동학에 빈민들이 몰렸고,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예언하는 도참을 믿는 자들과 병을 고치려고 하는 자들이 입도했고, 한글로 가르침을 베푸니 부녀자와 어린이들도 들어갔다고 쓰고 있다.

이어서 동학교도의 신원운동을 언급하면서 이후에는 동학이 더욱 치성했고, 고부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백낙도가 진주 덕산에 웅거했다가 체포되어 죽었다는 사실을 싣고 있다.

또 동학 지도자 김인배가 들어오자 손웅구가 그 지역에서 활동했고, 일본군의 진압 작전이 본격화된 10월 손웅구가 백곡에 18포(包)를 모아 기포해 진주로 갔다가 일본군에게 패해 도망갔다고 한다. 소장자는 경남 진주의 한주(韓胄)이며 경상사학(慶尙史學) 제6집에 영인되어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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