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개성 부근의 고려시대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몸체는 전체적으로 구형(球形)을 이루었는데, 개부(蓋部)와 화사(火舍)로 분리, 구성되어 있으며 경쾌하게 외반(外反)된 다리 3개가 부착되어 화사를 받치고 있다.
중첩된 산악(山嶽)의 형상을 이룬 반구형(半球形) 뚜껑의 정상에는 다각형의 큰 기공(氣孔)이 있으며 그 밑에 다시 돌아가면서 7개의 쌍엽형(雙葉形) 풍혈(風穴)을 배치하여 이를 통하여 연기가 발산되도록 하였다. 유약(釉藥)은 청백색을 띠는 백자유가 두껍게 시유(施釉)되었고, 빙렬(氷裂)이 거의 없으며 투명하고 광택이 있는 깨끗한 유조(釉調)를 지니고 있다.
이 향로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찰하여 볼 때 12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국적과 요지(窯地)를 가늠하기가 매우 어렵다. 형태는 중국 한대(漢代)의 박산향로를 단순화 · 양식화시킨 것으로서 서진(西晉) 때의 월주요 청자(越州窯靑磁)에도 이와 비슷한 형태를 갖춘 예가 보이고 있는데, 월주요 청자향로의 경우 뚜껑의 꼭대기에 새를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또 이 향로와 같이 구형을 이룬 몸체에 뚜껑의 윗면을 투각(透刻)하는 양식은 송대의 청백자향로 중에 더러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의 경우 12세기 중엽경에는 전북 부안에서 고려적으로 세련된 양질의 백자가 많이 생산되었으며, 양은 적지만 전남 강진의 요(窯)에서도 양질의 백자가 제작되었다. 이러한 점들로 보아 이 향로는 12세기 고려백자와 남송 초엽경의 청백자의 성격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작품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