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직립된 적당한 높이의 입부분에, 어깨에서부터 팽배해져 풍만한 둥근 몸체가 아래로 갈수록 서서히 좁아진 큰 항아리이다. 철채안료(鐵彩顔料)로 입둘레에 도안화된 무늬를 두르고, 몸체에는 어깨에서 허리부분에 걸쳐 능숙한 필치로 포도덩굴과 포도덩굴 사이를 뛰어넘는 원숭이를 그려넣었다.
원래 철분안료는 태토(胎土)에서 빨리 스며드는 경향이 있는 데다가 포도덩굴을 그린 철채안료가 지나치게 설채(設彩)되어 포도와 잎이 번져 엉키어 분명하지 않으나, 화원의 능숙한 필력(筆力)과 구도를 살필 수 있다.
유색(釉色)은 푸르름이 감도는 유백색(乳白色)의 백자유(白磁釉)로 전면에 고르게 시유(施釉)되었으며, 태토(胎土)는 수비가 잘 된 백토를 사용하였다. 굽다리는 안바닥을 깎아내고 세웠으며 모래받침으로 번조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처럼 직립된 항아리의 입부분은 18세기 전반기의 항아리에 공통되는 특징이며, 밝고 광택있는 유백색의 백자유는 18세기 전반경의 경기도 광주군 일대의 궁평리, 오향리, 금사리 요지 등에서 제작되었던 백자류와 비슷하다. 이 항아리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있는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 1962년 지정)와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백자 항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