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홍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의 장수.
이칭
여순(汝順)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2년(선조 5)
사망 연도
1646년(인조 24)
본관
수원(水原)
주요 관직
군자감봉사
관련 사건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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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의 장수.
개설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여순(汝順). 아버지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백천민(白天民)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성품이 호탕하고 지략이 많았으며, 행동이 용맹스러웠기 때문에 의를 위하여서는 죽음을 사양하지 않을 정도이었으며, 또한 악을 보면 반드시 물리치려는 협기가 있어 강인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2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천(泗川)에서 적을 피하여 노모와 함께 산중으로 들어갔다가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 적은 백홍제의 용맹을 가상히 여겨 죽이지 않고 적선(敵船)으로 끌고갔다. 그 뒤 계속 탈출을 시도하던 중 적의 칼을 빼앗아 배 안의 왜적을 죽이고 남녀 포로 70여 명과 함께 탈출하였다. 이 공으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가 되었다. 또한, 사천 땅에는 음사(淫祠: 미신을 믿는 사당)를 받드는 풍속이 있어, 신을 불경하는 자는 입과 코에서 출혈하여 죽는다는 소문이 나돌아 그 지방 수령도 어쩌지 못하였는데, 백홍제는 노하여 “요망한 것이 어찌 사람의 생사화복(生死禍福: 삶과 죽음 및 화와 복)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말이냐.”하고 그 신상(神像)을 불살라버리고, 사당도 헐어버렸다. 허목이 쓴 백홍제의 『의열전(義烈傳)』에 행적이 전한다.

참고문헌

『고산유고(孤山遺稿)』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기언(記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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