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군 북부 해안가에 위치하여 국방상ㆍ교통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514년(중종 9) 법성포에 진(鎭)을 설치하고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다가, 1708년(숙종 34) 첨사(僉使)로 승격시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1명 배치하고 관할하도록 하였다. 1514년 진성(鎭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1,688척(尺)이었다. 법성포는 조선 말기까지도 수군통제부를 설치하는 등 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또한, 법성창(法聖倉)을 설치하여 조운(遭運)에 이용하였다. 조선 중종 때에 나주의 영산창(榮山倉)은 수로가 험하여 배가 전복되는 등 손실이 많다고 하여 법성포에 창고를 짓고 영산창에서 맡아 거두던 전세(田稅)와 대동미를 거두게 하였다. 따라서 법성창은 주변 12개 지역의 전세와 대동미를 거두어 서울로 운송하는 구실을 담당하였다. 물자의 드나듦에 대하여는 법성첨사(法聖僉使)가 있어 계량(計量)을 감독하였다.
현재는 토사가 쌓여 항구로서의 기능은 많이 쇠퇴하였으나 조기의 어획으로 인한 어항으로서의 기능은 아직도 지속하고 있다. 또한, 영광군의 정기시장이 법성포가 있던 지역에서 개시되므로 주변지역에 대하여 시장중심지로서의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
행정상으로 법성포는 조선시대에 영광군에 속하였으며, 고종 때에 전국을 13개도로 분리할 때 전라남도 영광군 진량면에 속하였다가 현재는 법성면에 속하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