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는 지광국사현묘탑과 함께 절터의 동쪽 영당(靈堂) 구역에 세워져 있었다. 탑비는 지광국사현묘탑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세워져 있었는데 탑은 일제강점기에 외부로 반출되었다. 지광국사현묘탑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초기까지 계승되어 온 기본적인 승탑 조형 형식인 팔각원당형에서 탈피해 평면 방형의 새로운 형태로 화려하고 세련되게 조형된 승탑이다.
지광국사현묘탑과 탑비의 주인공인 해린(海麟, 984~1070)은 법상종 승려로서 현화사(玄化寺) 3대 주지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원주 출신으로 8살의 나이에 출가하여 16세인 999년(목종 2)에 용흥사(龍興寺)의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21세인 1004년(목종 7)에 왕륜사(王輪寺)의 대선장(大選場)에서 급제하고 대덕(大德)의 법계를 받았다. 이후 대사(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를 거쳐 73세인 1056년(문종 9) 왕사(王師)에 추대되었다. 1058년(문종 12)에는 봉은사(奉恩寺)에서 국사(國師)에 올라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1067년(문종 21) 법천사로 돌아왔고 1070년(문종 24)에 8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승탑은 지광국사 해린이 입적한 1070년경 직후에 조성되었고 지광국사탑비는 1085년에 건립되었다. 탑비의 글씨는 당대의 명신 정유산(鄭惟産)이 지은 문장을 명필 안민후(安民厚)가 썼다. 글씨는 구양순체이며 부드럽고 단아하게 작성되었다. 지광국사현묘탑은 우리나라 단일 석조 조형물 중에서 가장 화려한 작품이라 평가받고 있는데, 지광국사탑비 역시 승탑과 마찬가지로 세련미가 강조되어 있다.
지광국사탑비는 전체 높이가 5m에 달하며 비신 높이만 2.95m인 대형 탑비이다. 이 탑비는 귀부이수형의 탑비이며 일반적인 탑비의 구성 형식과 마찬가지로 귀부 · 비신 · 이수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원주시 관내에 위치한 흥법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는 나말여초기 크게 번성한 남한강 유역의 사찰들이다. 원위치에서 이동된 것도 있지만 이 사찰들에 조성되었던 승탑과 탑비는 지금도 전해져 온다. 탑비만을 비교한다면, 흥법사지 탑비는 귀부와 이수의 모습에서 역동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거돈사지 탑비는 조각에 있어서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에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는 세련미가 특히 강조되어 있으며 조각 수법이 섬세하고 화려하다. 또한, 이 용두와 비신 측면, 이수 등에 있어서 기타의 탑비와 차이를 보인다.
지광국사탑비의 용두는 목이 길게 솟아오르게 조각되어 있는데, 흥법사지나 거돈사지 탑비의 용두에는 없는 턱 지지대가 조각되어 있다. 이수의 상면에는 귀꽃 형태의 솟음 장식이 달려 있으며 이수 중앙에 탑의 상륜부와 같은 형태의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아울러 비신의 측면에는 화려한 용문양이 조식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 법상종계 비석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