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산성지 ()

의령 벽화산성 동문지비 정면
의령 벽화산성 동문지비 정면
건축
유적
문화재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에 있는 삼국시대 테뫼식으로 축조된 신라의 성곽터. 산성터. 시도기념물.
정의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에 있는 삼국시대 테뫼식으로 축조된 신라의 성곽터. 산성터. 시도기념물.
개설

벽화산성은 의령읍 하리 적곡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해발 378m의 하벽하산 정상부를 두르고 있는 6세기 말 또는 7세기 무렵에 축성된 테뫼식산성이다. 벽화산성의 둘레는 약 800m 정도이고, 벽화산의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타원형의 형태이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어 그 형태만 알 수 있지만, 성의 북동쪽과 북서쪽, 그리고 남동쪽의 일부분은 비교적 잔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벽화산성은 의령읍성(宜寧邑城)이 축조되기 이전까지 의령의 치소 역할을 수행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83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벽화산성은 6세기 중엽에 창녕을 점령한 신라가 함안과 의령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6세기 말 무렵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벽화산성의 주된 사용 시기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사용된 이후에는 완전히 폐기되어 성의 기능을 상실하였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부터 성 내부에 공동묘지를 조성하였다.

내용

벽화산성은 2000년 지표조사에서 체성(體城)과 문지(門址), 치(雉), 장대지(將臺址), 건물지 등의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2001년에는 체성과 문지 2개소를 중심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벽화산성의 체성은 자연 지세를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내외의 경사가 큰 곳에는 편축으로 축조하였고, 경사도가 작은 곳은 협축으로 축조하였다. 현재 확인되는 체성의 폭은 1.2~1.8m 정도이다.

체성은 축조방법의 뚜렷한 차이로 인하여 시기가 다른 2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 시기에 성을 축조하고 난 다음(이하 성1)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이후 앞선 시대의 성을 기단부로 활용하여 다시 축조하였다(이하 성2). 즉 벽화산성이 위치하는 산 정상에 성이 축조되고 난 이후에 이미 축조된 체성을 기단부로 활용하여 다시 그 위로 성벽을 수직으로 축조하였다.

성1은 길이 30∼60㎝, 두께 10㎝ 내외의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품(品)자형으로 쌓아 올린 성으로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1m 정도이다. 성벽의 하단에 점토와 세석을 혼합하여 다짐처리를 하였는데 높이는 50㎝ 정도이며, 그 위로 다시 돌을 쌓아 보강하였기 때문에 원래 보축의 높이는 1m를 넘었을 것으로 보이고 단면은 삼각형의 형태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2는 현재 남아 있는 높이는 2m 가량이지만 원래의 높이는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체성의 내벽은 30∼50㎝ 정도의 대석을 성벽과 직교하게 설치하였고, 그 위로 폭 1.5m 내외, 높이 70㎝ 정도로 협축하였다. 외벽은 내벽에서 1.5m 정도 떨어져 확인되었는데, 현재 7∼10단 정도 남아 있으며 높이는 1.8∼2.2m 정도이다.

문지는 동문지와 남문지가 조사되었는데, 동문지의 폭은 약 3m 정도이고 성2의 문지 역시 성1을 기단으로 활용하였다. 남문지는 성1의 체성 위에 약 50㎝ 가량 들여쌓았으며, 최근까지 사용하다가 폐기된 상태이다.

출토유물은 토기류, 자기류, 와당류로 크게 구분되는데, 가장 빠른 것은 6세기 후반 무렵, 늦어도 7세기 초를 넘지 않는다. 그리고 8세기대를 중심으로 하는 유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은 출토된 반면에 조선시대의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특징

벽화산성은 산성으로는 보기 드문 내성과 외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중으로 이루어진 성이거나 해발 526m의 상벽화산과 하벽하산을 독립적으로 두른 쌍성의 구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표조사 결과 하벽화산의 정상부를 두르고 있는 테뫼식산성으로 확인되었다.

의의와 평가

벽화산성은 의령읍성이 위험에 처하였을 때에는 이곳으로 입성하여 농성하였고, 의령읍의 주위에 있는 산성들은 의령의 외곽방어를 위해 축조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즉 벽화산성은 임진왜란 당시에 전승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단순한 피난처라기보다는 적극적인 방어를 위해서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의령 벽화산성지』(의령군·경남문화재연구원, 2001)
『의령벽화산성지 정밀지표조사결과보고서』(경남문화재연구원, 2000)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김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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