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문숙(文淑). 원양군(原陽君) 변사겸(邊士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력(經歷) 변윤계(邊胤季)이고, 아버지는 공조좌랑 변열(邊悅)이며, 어머니는 병사 이흔(李昕)의 딸이다.
문예에 능하였으나 과거에 실패하고 무예에 열중하여 1585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월송만호(越松萬戶)·선전관 등을 거쳐 해남현감으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내의 소요를 진정시키는 한편, 격문을 돌려 의병을 규합하였다. 또 대군으로 침입한 적의 본토가 비어 있을 것을 들어 이를 공략하면 왜는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 일본 정벌을 상소하였다.
금산에서 조헌(趙憲)과 합류하여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행군에 차질이 생겨 조헌이 전사한 뒤에 도착, 육박전으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으나 적의 야습을 받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는 전라수군절도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알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적은 변응정의 충의에 탄복하여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충간의담(朝鮮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웠다. 싸움에 나서기에 앞서 동생에게 글을 보내 ‘주욕(主辱: 임금이 욕을 당함)에 신사(臣死: 신하로서 죽음이 마땅함)’라 하여 비장한 결의를 보이고 노모와 작별하는 뜻을 고하며 입던 옷과 머리카락·손톱을 함께 보내 죽은 뒤 이것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당부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과 송시열(宋時烈)의 송자대전(宋子大全) 등에는 웅령(熊嶺)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잘못된 것이다. 후에 정문(旌門: 충신을 표창하기 위하여 본인의 집앞이나 마을에 세우는 붉은 문)이 세워지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