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026년(현종 17) 건립. 화강암제로서 이수와 귀부를 모두 갖추어 일반 석비(石碑)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현종이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홍경사를 조성하였다는 뜻에서 전액(篆額)을 “奉先弘慶寺碣記(봉선홍경사갈기)”라 사명(賜名)하였다. 갈기(碣記: 비석의 기록)에 의하면, 절이 있는 곳에 인적이 끊겨 도적이 많았으므로 이러한 우환을 없애기 위하여 승려를 불러 불법을 전하고자 절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현종 7년에 기공하여 6년 여에 걸친 공사로 당전(堂殿) 등 200여 칸을 짓고, 또 절 서쪽에 객관(客館) 80칸을 세워 경연통화원(慶緣通化院)이라 불렀다 한다.
글은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최충(崔沖)이 지었으며, 글씨는 백현례(白玄禮)가 썼다. 글씨는 자경 3㎝의 해서로 용필과 짜임새가 엄정하다. 구양순(歐陽詢)의 「황보탄비(皇甫誕碑)」에 가까우며 고려시대 해서로는 제1급이다.
방비원갈(方碑圓碣: 네모난 비석은 ‘비’라하고 둥근 비석은 ‘갈’이라한다)이라 하여 본래 비와 갈은 구분되었으나 이 홍경사갈은 일반적인 비와 다름없다.
현존하는 사적비를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으로 용두화(龍頭化)된 귀두(龜頭)는 오른쪽으로 돌려 생동감을 더하고 있으며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장식하였다. 귀갑(龜甲) 중앙에는 앙련과 복련을 새긴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웠다. 비신 상단에는 전액이 있으며, 비면 가장자리에는 당초문대(唐草文帶)를 두르고 비신 옆면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을 조각하였다. 이수에는 도식화된 운룡문을 조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