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 후반에 저술된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나라에 큰 창고가 없으며, 집집마다 각기 조그만 창고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이름하여 부경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본디 ‘경(京)’은 한자의 창고를 나타내는 말로 짐작된다.
이것이 백제에 영향을 끼쳐서 창고사무를 맡은 내관(內官) 소속의 관청 이름을 경부(广+京 部)라고 부르게 된 듯하다. 비록 『북사(北史)』권94 백제전에는 이를 내략부(內掠部)·외략부(外掠部)라 했으나, 『한원(翰苑)』권30 백제조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는 각기 내경부(內椋部)·외경부(外椋部)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권40 직관지(職官志)에도 이 경(椋)이 경(广+京)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경은 일본어 경(椋, クラ)이 그대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 수도였던 집안(集安) 일대에는 당시 어느 가옥이나 본채 옆에 2층으로 된 작은 창고가 있었다.
이는 얇은 목재를 가로 또는 세로로 엮어서 다락식 창고 형태로 지은 것인데, 현지에서는 옥미창(玉米倉) 혹은 포미창(包米倉)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옥미창은 특히 만보정묘구(萬寶汀墓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옛 강서군(江西郡) 덕흥리 벽화고분에 보이는 2층 다락집도 이와 모양이 비슷하다.
한편, 집안의 미선구(麻線溝) 제1호묘에 보이는 귀틀집(高床式 건물)은 일본의 쇼소인[正倉院] 쌍창(雙倉)으로 연결된다는 견해가 유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