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묘도감의궤 ()

선조대왕의인왕후부묘도감이방의궤
선조대왕의인왕후부묘도감이방의궤
유교
문헌
조선시대 왕이나 후비 등의 상사 시 3년의 상기를 마친 후 신주를 혼전에서 종묘로 모실 때의 의식과 절차 등을 기록한 의궤.
정의
조선시대 왕이나 후비 등의 상사 시 3년의 상기를 마친 후 신주를 혼전에서 종묘로 모실 때의 의식과 절차 등을 기록한 의궤.
내용

현재 규장각에 32종의 부묘도감의궤가 보존되어 있다. 내용별로 보면 부묘(祔廟)·복위부묘(復位祔廟)·부궁(祔宮)·입묘(入廟) 등으로 분류되지만, 대부분 『부묘도감의궤』이다. 왕의 경우는 3년의 상기가 끝나는 대로 부묘하게 되나, 왕비는 왕의 생전에 상을 당할 경우 3년의 상기가 끝난 뒤에도 혼전에 계속 신주로 모시다가 왕의 3년상이 끝나기를 기다려 같이 부묘되었다.

복위부묘는 폐위된 왕이나 왕비를 복위해 부묘하는 경우이다. 입묘·부궁은 세자·세자빈·후궁의 신주를 소상(小喪) 후에 별묘(別廟) 또는 별궁(別宮)에 모시는 경우이다.

이 의궤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 그 구성과 체재 면에서 대개 숙종 이전, 숙종∼정조, 순조 이후 등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숙종 이전의 의궤들은 책머리에 별도의 목록은 없으나, 기록된 내용을 보면 권수에 부묘예일(祔廟禮日)이 있고, 이어 이조별단(吏曹別單)·계사(啓辭)·내관질(來關秩)·이문질(移文秩)·감결(甘結)·일방(一房)·이방(二房)·삼방(三房)·서계(書啓)·논상(論賞)·의궤(儀軌)의 순으로 기록되어 있고, 권말에 반차도(班次圖)가 실려 있다.

숙종부터 정조연간의 의궤들은 권두에 목록이 있고, 이어 좌목(座目)·계사·별단·이문·내관·품목(禀目)·감결·예관(禮關)·부의궤(附儀軌)·서계·논상·일방·이방·삼방·조주소(造主所)·별공작(別工作)·수리소(修理所) 등의 순으로 기록되어 있고, 반차도는 일방의 의궤 속에 실려 있다.

순조 이후의 의궤들은 권두에 목록이 있고, 이어 시일(時日)·좌목·승전(承傳 : 詔勅·附奏啓·별단)·재용(財用:附料布式側)·감결·이문·내관·예관·의주(儀註)·상전(賞典)·의궤(儀軌:事目)·일방·이방·삼방·별공작·종묘수리소(宗廟修理所) 등의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차도는 역시 일방의궤 속에 수록되어 있다.

이 의궤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담제(禫祭)가 끝나는 대로 부묘도감을 설치하는데, 이 도감은 존숭도감(尊崇都監) 등과 합설(合設)되는 경우가 많다. 이어서 당상(堂上)·낭청(郎廳) 등을 왕의 재가를 받아 임명한 내용과 습의일(習儀日)·부묘일을 택일한 내용 따위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혼전에서 종묘 등에 부묘시키기까지의 제반 의식 절차와 준비 과정이 기록되고 있다. 그 구체적 업무는 3개의 방(房)과 별공작소·수리소 등이 분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방은 여연(轝輦)·각상(各床)·책궤(冊櫃) 등, 이방은 금보(金寶) 등, 삼방은 제기질(祭器秩) 등을 맡고 있으며, 조주소는 신주를 새로 만들고, 수리소는 종묘를 수리한다.

각방 의궤 속에는 작업 내용에 관한 상세한 도면이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반차도는 혼전에서 종묘 등으로 신주를 옮겨가는 관원·여연군(轝輦軍) 등의 행렬도인데, 여(輿)·연(輦)을 중심으로 선두에 사령(使令)을, 뒤에는 후사대장(後射隊長)을 배치하고 있다.

서지적 사항

이 의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610년(광해군 2)에 선조와 그의 비 의인왕후(懿仁王后)를 부묘한 기록인 『선조대왕의인왕후부묘도감의궤(宣祖大王懿仁王后祔廟都監儀軌)』가 있다. 이 책은 일방의궤·이방의궤·삼방의궤로 분책되어 있다.

복위부묘에 관한 의궤에는 1698년(숙종 24) 단종과 그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를 복위시켜 종묘에 부묘한 의궤와 1739년(영조 15) 중종의 폐비 신씨(愼氏)를 복위시켜 종묘에 부묘한 의궤 등이 있다.

입묘에 관한 의궤에는 1832년(순조 32) 순조의 세자로서 뒤에 익종(翼宗)으로 추존된 효명세자(孝明世子)를 문호묘(文祜廟)에 입묘한 의궤와 1824년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를 입묘한 의궤 등이 있다.

이 밖에 『공성왕후부묘도감의궤(恭聖王后祔廟都監儀軌)』는 1615년 선조의 후궁이며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金氏)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追崇)해 부묘한 기록이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다시 공빈(恭嬪)으로 추삭(追削)되었다.

부궁에 관한 의궤에는 세자빈으로 죽은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의 빈 헌경혜빈(獻敬惠嬪)을 1817년 경모궁(景慕宮)에 부궁한 의궤가 있다. 그 뒤 1899년 장헌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자 혜빈도 헌경왕후(獻敬王后)로 추숭되어 종묘에 부묘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 및 종묘의 제례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의식과 절차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참고 자료가 되고 있다.

집필자
이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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