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

고대사
지명
서기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濊貊族)의 국가.
이칭
이칭
북부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서기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濊貊族)의 국가.
형성 및 변천

‘북부여’라고도 한다. 국호인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puhu’라는 말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부여는 서기전 1세기의 중국측 문헌에 등장하므로 이미 그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에 관해서 중국측 기록인 『논형(論衡)』과 『위략(魏略)』에서는, 시조인 동명(東明)이 북쪽 탁리국(橐離國)에서부터 이주해와 건국하였다 하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서는 당시 부여인들이 스스로를 옛적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부여국의 중심집단이 어느 시기에 이동해왔음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그 구체적인 이동 시기나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근래 북류 송화강과 눈강(嫩江)이 합류하는 지역 일대인 조원(肇源)의 백금보(白今寶)문화나 대안(大安)의 한서(漢書)문화를 동명 집단의 원주지인 탁리국의 문화로 간주하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 구체성이 부족하다.

부여국은 서로는 오환(烏桓)·선비(鮮卑)와 접하고, 동으로는 읍루(挹婁)와 잇닿으며,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3세기 전후 무렵 영역은 사방 2천리에 달하는 광활한 평야지대였다.

부여국의 중심지역인 부여성(夫餘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장춘(長春)·농안(農安)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이 일찍이 제기되었다.

부여성은 고구려의 북부여성이며 발해의 부여부(扶餘府)인데, 요(遼)나라가 발해를 멸한 뒤 부여부 지역에 황룡부(黃龍府)를 설치했고, 그것이 금대(金代)에 융안부(隆安府)가 되며 오늘날의 농안부근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와는 달리 황금의 명산지이며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完顔部)의 발흥지인 아성(阿城)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 창도(昌圖) 북쪽의 사면성(四面城) 지역으로 보는 설, 북류 송화강 하류의 오늘날의 부여(扶餘)로 추정하는 설 등이 제기된 바 있다.

한편 이들 지역에서 뚜렷한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서, 산성이 있고 한대(漢代)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며 청동기시대에는 서단산문화의 중심지였던 길림시(吉林市) 일대를 부여국의 중심지로 비정하는 설이 근래 제기되었다. 나아가 길림시 지역이 부여국의 초기 중심지였고, 농안 부근은 후기 중심지였다고 여기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정치체제

초기 부여의 정치체제는 부족연맹체적인 성격을 지녔다. 왕은 일정한 가계(家系)에서 나왔을 것이나 선임(選任)의 유제가 강하게 존속하였다.

족장회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왕은 주술적인 신이한 능력을 지닌 제사장적인 성격도 짙게 띠고 있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해 농사에 흉년이 들면 허물을 곧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했던 사실은 그러한 면을 반영해준다.

그 뒤 점차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감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어갔다. 3세기 전반 부여의 왕위는 간위거(簡位居)·마여(麻余)·의려(依慮)로 이어지는 부자계승이 행해졌다. 특히, 마여가 죽은 뒤 아들 의려가 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한 것은 그러한 면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부자상속의 관행이 확고히 정립되지 못했고, 친족집단의 분화도 깊히 진전되지 못해 공동체적 요소는 상당히 잔존해 있었다.

당시 중앙에는 왕 아래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 등의 관인이 있었다. 가(加)는 수장(首長)으로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중앙의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가들이 각기의 읍락들을 통솔하였다. 대가(大加)는 수천호를, 소가(小加)는 수백호를 지배하고 있었다. 전시에는 가들이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왕의 기치 아래 모여 참전하였다.

왕은 가들의 대표로서 군림했으나, 초월적인 권력자는 되지 못하였다. 가들은 각자의 읍락들을 자치적으로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대외적으로 부여는 남으로부터의 고구려의 위협과 서쪽의 유목민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부여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을 꾀하였다. 중국 측도 선비족과 고구려의 결속을 저지하고 제압하는데, 부여의 무력을 이용하기 위해 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20년 위구태(尉仇台)는 부여왕자로서, 136년에는 부여왕으로서 직접 한(漢)나라를 방문했고, 한은 그를 융숭히 대접하였다. 또한 위구태는 당시 요동의 지배자였던 공손탁(公孫度) 집안의 여인과 혼인을 하였다.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244∼245) 현도태수 왕기(王頎)가 부여를 방문했고, 부여는 그들에게 군량을 제공하였다. 양측 간에는 그 뒤에도 밀접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한편, 부여는 동으로 읍루족을 복속시켜 공납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220년대 초 읍루가 떨어져나가자 몇 번 공격했으나 험난한 지형과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끝내 평정하지 못하였다.

생활형태 및 사회체제

부여인은 농업을 영위해 오곡을 생산하였다. 목축도 성행해 말·소·돼지·개 등이 주요한 가축이었다. 특히,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였다.

농경민이면서도 기마 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훌륭한 말을 산출했으므로 부여족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전투력을 지닐 수 있었다. 부여족의 일파가 남으로 이주해 고구려나 백제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던 것도 이러한 면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인들은 흰색을 숭상해 흰옷을 즐겨 입었다. 상복도 남녀 모두 흰옷이었다. 장례는 5월장이었다. 여름에는 얼음을 써서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혼인을 할 때에는 남자집에서 여자집에 혼납금(婚納金)으로 소와 말을 보내었다.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면 모두 죽였다. 특히, 부인의 질투를 미워해 죽인 뒤 시체를 산 위에 가져다가 썩게 내버려두었다가 여인의 친정에서 딸의 시체를 거두어 가려면 남자집에 소와 말을 보내야 하는데, 이는 혼인 때의 혼납금을 되돌려주는 형식이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였다. 이처럼 취수혼(娶嫂婚, levirate)이 선호혼(選好婚)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은 당시 부여사회에서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당시 고구려에서도 취수혼이 성행하였는데 부여의 상황과 비슷한 면을 지녔다.

12월에 영고(迎鼓)라는 축제를 거행하였다. 12월은 본격적인 사냥철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 때에 축제를 거행함은 공동수렵을 행하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축제 때에는 노예나 외래민을 제외한 전 부여의 읍락민들이 참여했다.

축제기간 중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고 즐기면서 서로간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이 때 죄수들에 대한 재판과 처벌을 단행했고, 일부 가벼운 죄를 범한 자들은 석방하였다.

수도에 전국의 가(加)들이 모여 왕을 중심으로 하늘에 제사지내고 지난 한해를 결산하며 주요 문제를 토의하여, 국가의 통합력을 강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직도 전국에 걸친 지배조직이 미비하고, 지방 각지에서 읍락들을 지배하고 있던 가(加)들의 자치력이 강하던 상황에서, 영고는 비단 민속적인 행사로서 뿐 아니라 정치적인 통합기능도 매우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국의 국가구조에서 기본 단위를 이루었던 것이 읍락이다. 각 읍락에는 우두머리(渠帥)인 호민이 있으며 그 밑에 일반민이 있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읍락민이 하호(下戶)로서 모두 노복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기술하였다. 하호는 당시 중국에서 빈한한 소작농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기록에 의거해 부여의 읍락민을 노예나 농노로 규정하는 설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이 시기 부여의 읍락에는 철제 농기구가 부족하고 특히 보습과 같은 대형의 농기구는 주로 호민이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농업생산력이 상대적으로 낮아 수확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읍락민은 농경 등의 일상생활을 호민의 주재 하에서 영위하고 통제를 받았다.

부여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던 위나라 사람이 보았을 때, 가난하고 열세한 읍락민의 외형상의 모습이 호민의 소작농이나 노복처럼 여겨져 그런 기술을 했던 것이다. 부여의 하호는 노예나 농노가 아니라 읍락의 일반민이었고, 호민은 읍락의 거수(渠帥)였다.

당시의 읍락에는 촌락공동체적 요소가 상당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호민은 기존의 촌락공동체적 요소를 활용함을 통해 우월적 지위를 강화해나갔고, 다른 한편에서는 읍락민들도 전래의 관습과 공동체적인 상호부조에 의지해 그들의 삶을 유지해나갔던 상황으로 여겨진다.

또한 부여의 읍락민은 모두 동일한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읍락민이 호민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그들 내에서도 자영농민층과 빈농층의 분화가 진전되고 있었다. 전쟁 때에는 스스로 무장해 참전했던 이들과 그렇지 못해 양식을 운반하는 노무부대로 참가하는 이들로 나뉘어졌음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이러한 읍락을 수개 내지 수십개를 지배했던 것이 가(加)들이다. 가들과 그 일족은 지배계급으로서, 왕의 일정한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각기 지배 하에 있는 읍락들을 자치적으로 통할했으며, 이들 읍락으로부터 징수한 공납으로 생활하였다.

이들은 외국에 나갈 때 수를 놓은 비단옷에 모피·갓을 쓰고 금은으로 장식을 하며 호사로움을 과시하였다. 전체적으로 가 계층의 부력은 상당했고, 그들에 의한 부의 집중이 진전되고 있었다.

일반민 아래 노예가 존재하였다. 가들과 호민들은 상당수의 노예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례에 때로는 백수십인을 죽여 순장(殉葬)을 하기도 하였다. 순장된 노예는 전쟁포로 노예가 많았을 것이나 가내노예도 상당했을 것이다.

노예에는 전쟁포로 출신뿐 아니라, 형벌노예와 부채노예도 있었다. 부여의 법에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절도를 할 경우 12배로 배상하게 하였으며, 변상이 여의치 않으면 노예로 삼았을 것이다. 빈한한 읍락민 중 일부는 점차 가나 호민의 예속민으로 전락해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보면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의 부여의 사회는 제가층(諸加層), 호민층,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읍락민, 빈한한 읍락민, 노비 등 대략 다섯층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부여사회는 공동체적 유제가 잔존해 있는 가운데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체제에서도 연맹체적 성격이 강인하게 존재하는 가운데서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가는 추세를 보였음과 서로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소멸 과정

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부여국은 격심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주변정세가 급속히 변화함에 따른 것이다.

부여는 지형상으로 대평원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외침을 방어하는데 취약점이 있었다. 그리고 삼림민·유목민·농경민이 서로 교차하는 중간지대에 있어 주변세력의 변화에 따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았다.

특히, 3세기 종반 이후 중국의 통일세력이 무너지고 유목민세력이 흥기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의 시기에 접어들게 됨에 따라 더욱 그러해졌다. 남으로부터 가해지는 고구려의 압력과 서쪽의 선비족의 세력 팽창에 의해 여러 차례 공략을 당하였다.

285년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1만여 인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 때 국왕 의려는 자살했고, 부여왕실은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다.

이어 의라(衣羅)가 왕위를 계승한 뒤 진(晉)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선비족을 격퇴하고 나라를 회복하였다. 이 때 북옥저로 피난했던 부여인들 중 일부는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일부는 그대로 머물어 토착하였다.

길림 방면의 부여는 그 뒤 계속 모용씨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많은 수의 부여인들이 포로가 되어 북중국에 노예로 전매되어 갔다.

당시 부여는 진나라가 쇠망함에 따라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어 고구려의 공략을 받자 더 이상 길림 일대의 원 중심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346년 서로부터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대타격을 입었다. 이 때 국왕 현(玄) 이하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 뒤 쇠약해진 부여는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는 부여에 군대를 주둔시켜 이를 통할하였다. 부여왕실은 고구려의 지배하에서 고구려의 부여지역 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북옥저 방면에 정착했던 부여인들은 본국과 분리되어 점차 자립하게 되었다. 이를 고구려인들이 동부여라고 했고, 길림 및 장춘·농안 방면의 부여를 북부여라고 불렀다. 동부여는 410년광개토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북부여는 457년 북위에 조공을 하여 한 차례 국제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시도에 불과했고, 고구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

5세기 말 동만주 삼림지대에 거주하던 물길(勿吉)이 흥기해 고구려와 상쟁을 벌이고, 동류 송화강(松花江)을 거슬러 세력을 뻗쳐나갔다.

이에 부여는 그 침략을 받게 되고, 부여왕실은 안전한 고구려 내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부여지역의 통제를 위해 존속시켰던 부여왕실의 명맥은 그 지역을 상실하면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494년(문자왕 3)에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논형(論衡)』
『위략(魏略)』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위서(魏書)』
「한국고대국가발달사」(김철준, 『한국문화사대계』1,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64)
「부여고」(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부여국의 경역과 그 변천」(노태돈, 『국사관논총』4, 1989)
「扶餘考」(池內宏,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3, 1936)
「魏志東夷傳のみえる下戶問題」(武田幸男, 『朝鮮史硏究會論文集』 3, 朝鮮史硏究會, 1967)
「夫餘國考」(日野開三郞, 『史淵』 34, 九州大, 1976)
「夫餘的疆域和王城」(李健才, 『社會科學戰線』82年 4期)
「夫餘王城新考」(武國勛, 『黑龍江文物叢刊』1984年 4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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