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4월 19일 마을 주민의 제보로 국립공주사범대학 백제문화연구소와 국립박물관(공주분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표토(表土)의 유실이 심해 봉토(封土)의 유무는 확인할 수 없었다. 표토를 20㎝ 정도 제거하니 남방식 지석묘의 작은 개석(蓋石)과 같은 1개의 커다란 개석이 드러났다. 개석을 옮긴 뒤 드러난 석관 안은 흙과 사람머리 크기의 돌을 섞어 채워 넣은 상태였다. 매몰된 흙과 돌을 80㎝ 정도의 깊이로 파냈을 때 유물이 발견되면서 바닥이 드러났다.
돌널[石棺]의 구축(構築)은 먼저 풍화암토(風化岩土)를 파내고 네 벽을 세운 뒤 바닥에 돌을 깔고 유해를 안치하였다. 그리고 흙과 돌을 섞어 석관의 안을 채우고 개석을 덮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돌널무덤은 한반도에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출토된 무덤의 구조가 정식 조사된 최초의 유적으로 중요하다. 돌널무덤은 풍화암반(風化巖盤)을 파서 만들었는데, 지표아래 20㎝정도에 길이, 너비, 두께가 2.6×1.2×0.2m 정도의 장타원형(長橢圓形) 판돌[板石]을 덮고, 그 아래에는 35˚정도 서쪽으로 치우친 남∼북 방향으로 돌널이 있었다. 돌널[石棺]은 머리쪽이 넓고, 발치가 좁은 두광족협식(頭廣足狹式)으로 길이, 너비가 2.05×1.0m의 장방형(長方形)을 하고 있다. 바닥에는 널의 폭보다 좁은 판돌 3매를 가로로 깔고, 그 사이를 작은 판돌로 덮었다. 네 벽은 판돌로 세워 조립(組立)하였는데, 높이는 0.8×0.9m 정도이다. 동·서벽은 4∼5매, 남·북벽은 각각 1∼2매로 구성되어 있다. 널의 내부에는 가는 모래와 자갈돌로 채웠으며, 유물은 바닥면에서 발견되었는데, 피장자(被葬者)의 왼쪽 발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비파형동검과 돌화살촉, 대롱옥[管玉], 장식옥[飾玉]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출토된 동검을 보면 봉부(鋒部)에서 꼬다리[莖部] 끝까지의 길이가 33.4㎝로, 등날이 봉부의 선단(先端)까지 발달하고, 등대의 중간에 돌기부(突起部)가 뚜렷하다. 날의 돌기도 크고, 하반부 양측의 날이 둥글게 팽창하여 기부 가까이에서 최대폭을 갖는다. 꼬다리 끝 한쪽에 홈이 파 있는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으로 비교적 이른 형식이다. 간돌검 1점은 혈암제(頁巖製)로 등날이 선단부터 자루 끝까지 이어지므로, 검신(劍身)과 자루의 단면이 모두 마름모꼴인 일단병식(一段柄式)이다. 전체 길이 34.1㎝로, 직선에 가까운 날 곳곳에 마멸된 흔적이 있다. 돌화살촉은 11점 출토되었는데, 모두 몸의 단면이 마름모꼴인 유경식(有莖式)으로 슴베 단면은 육각형이고, 기단부(基端部)가 뾰족하다. 날의 중간쯤에서 양날이 살짝 각이 지면서 아래 단으로 평행하게 다듬어진 것이 특징으로, 전체길이가 10.3∼19.9㎝ 정도로 긴 편이어서 비실용적이다. 이밖에 대롱옥은 17점 출토되었는데, 벽옥제(碧玉製)로 표면이 잘 마연되었고, 굽은옥은 2점으로 천하석제(天河石製)이다.
송국리 유적의 집자리에서는 부채꼴 모양의 도끼[扇形銅斧] 거푸집[鎔范]이 확인되었는데, 이 형식의 도끼와 비파형동검이 공반출토된 예가 요하유역에 있다. 따라서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돌널무덤과 송국리식민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집자리는 같은 시기의 동일 주민집단의 소산으로 인정된다.
백제시대의 고분으로는 독널무덤[甕棺墓]과 움무덤[土壙墓]이 있다. 독널무덤은 40·56·68지구에서 각각 1기씩 발굴되었다. 이 중 40지구의 것에서는 정확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구체적인 매장방법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다만 포탄형의 토기 3점, 자배기 1점이 확인되어 이것이 독널무덤에 사용된 토기로 추정되고 있을 따름이다. 56지구의 것은 이음식[合口式]독널무덤으로 일상생활에 이용하던 2점의 독을 전용한 것인데, 그 중에서 1점의 독은 독널로 전용하기 전에 이미 바닥 부분이 깨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용하면서 다른 독의 파편으로 이 깨진 부분을 막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68지구의 독널은 3점의 토기를 이용하여 독널을 구성하고 있다. 동체의 대칭되는 부분을 미리 깨뜨린 자배기를 바닥을 위로 향한 채 뒤집어 놓은 후 2점의 독은 횡치하여 자배기의 깨진 부분에 구연부를 삽입한 형태의 독널무덤이다. 아울러 절반 가량이 파손된 2점의 자배기를 이용하여 공간이 생긴 부분을 덮고 있다.
송국리 유적에서 확인된 움무덤 중 개괄적이나마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71지구에서 발견된 2기이다. 2기 모두 나무널[木棺]의 존재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무덤구덩이 내부의 매장 주체로서 나무널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중에서 1호 움무덤은 움의 중심부에 2점의 토기와 1점의 쇠손칼[鐵刀子]이 부장되어 있었는데, 피장자의 머리나 발쪽이 아니라 가슴이나 허리 부분에 부장품이 매납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2호 움무덤의 경우는 부장된 큰독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움무덤의 부장품과는 다르다는 점에서는 움무덤이 아니라 독널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즉 무덤구덩이를 파고, 큰독을 널로 횡치하였던 것이 후대의 지형 삭평이나 교란으로 인하여 큰독의 윗부분이 없어지고, 바닥 쪽의 파편만이 남아서 발굴당시에는 움무덤의 부장품으로 오인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부인 할 수 없다. 아니면 큰독이 나무널을 고정시키기 위한 시설로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되고 있다.
부여송국리고분은 비파형동검을 사용하는 초기 청동기문화인들이 송국리 일대에 들어와 이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었음을 일깨워준다. 이것은 후기 청동기·철기시대에까지 계승·발전되어 이 일대에 일찍이 부족사회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송국리를 비롯한 주변 일대에서 발견되는 각 시대의 유적이 입증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