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염창리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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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염창리 출토 옹관
부여 염창리 출토 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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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독무덤 · 움무덤 ·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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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독무덤 · 움무덤 ·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2011년 7월 20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75년 12월 31일 동민에 의해 우연히 호관묘(壺棺墓)가 발견되어 조사되기 시작하였다. 2000년 공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고분군이 대대적으로 조사되었다. 조사가 이루어진 염창리 유적은 기존에 염창리 도덕골 고분군으로 알려진 유적과 서북쪽으로 인접되어 있는데, 유구는 백제시대 고분군으로 단일하다. 조사지역은 동쪽에서 서북쪽으로 뻗어내리던 능선이 점점 낮아지다가 서쪽 끝에서 치솟아 표고 1.1m의 야산 봉우리를 형성하고, 이 봉우리에서 다시 서쪽으로 갈라져 내려 온 가지능선 사면에 해당된다.

내용

1975년 조사에서의 유구가 입지하는 토질은 돌이 없는 황갈색 점토층이다. 지표 아래 20∼25㎝ 깊이에 축조되어 있었고, 봉토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구조는 비교적 간단하다. 생토면을 남북 1.4m, 동서 75㎝, 깊이 40∼86㎝의 타원형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장축(長軸)방향을 대략 남북으로 취하게 하였다.

토광 안의 벽면은 경사가 진 동·서 양쪽 벽면만 잡석을 2단으로 쌓았고, 남·북 벽면은 흙벽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이 안에 큰 항아리와 중간이 잘린 그릇받침을 서로 합개식(合蓋式)으로 연결하였다.

항아리의 바닥과 벽면 사이에는 암키와 1매를 세워 끼웠는데 뚫어진 항아리 바닥으로 흙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은 남쪽 벽면에서부터 중심을 향해 암키와 2매를 길이로 이어 깔았다. 그 위에 큰 항아리를 옆으로 뉘어 놓았다. 항아리는 입을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그릇받침의 넓은 바닥부분을 막는 형식이다. 모양은 구형신(球形身)으로 목이 짧고 입술이 약간 외반한 형태이다. 바탕흙은 곱고, 색깔은 흑회색이며, 표면은 모두 자리문양을 새겼다. 크기는 높이 75㎝, 구경 44㎝, 최대 복경 72.5㎝이다.

뚜껑으로 사용한 그릇받침은 당초부터 파손품을 재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바탕흙은 곱고 경질의 흑회색이다. 중간에 2개의 돌대를 돌렸다. 돌대 사이에는 고사리문양을 만들어 붙이고 심엽형투공(心葉形透孔) 2개를 1조로 해 상하로 3곳에 배치하였다. 크기는 높이 43.5㎝, 바닥 직경 50㎝이다. 3매의 암키와는 모두 바탕흙이 잘 구어진 무늬없는 백제기와이다. 크기는 35.5×42.5㎝이다.

이와 같이 큰 항아리와 그릇받침을 합개해 옆으로 관을 배치한 예는 능산리고분군에서 발견된 적이 있어 낯선 것은 아니다. 뚜껑으로 그릇받침대신 자배기를 사용한 예도 같은 염창리 상염(上鹽)마을에서 나온 적이 있다.

이러한 호관묘형식의 장법(葬法)을 결정지을 만한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상염마을에서는 금동제 귀걸이 1쌍과 성인여성의 치아 10여 개가 나와 장법은 육탈(肉脫) 후 뼈만을 추려서 다시 매장한 2차장으로 추정한 바 있다. 여기도 그와 같은 형식으로 생각된다.

또 매장된 사람도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예는 공주 봉정리(鳳亭里)에서도 발견되었다.

2000년 발굴조사결과 Ⅰ-Ⅲ지구로 나누어 조사한 유적에서는 백제 돌방무덤(石室墳) 139기와 움무덤(土壙墓) 1기가 확인되었다. 돌방무덤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50기,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 60기, 파손이 심하여 형태를 알 수 없는 고분 29기로 구분되는데, 이 고분들도 파손된 고분 가운데 벽의 단면으로 미루어 볼 때 굴식의 형태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고분의 분포는 6∼9m 내외의 간격으로 일정한 분포상을 보인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 있어서는 골짜기에 접하는 급한 경사면에 고분을 축조하기 위해서 축대를 2중으로 축석한 형태도 보인다. 굴식 50기는 등고선 방향에 직교하여 장축을 두었는데, 널길(羨道)은 문틀시설이 있는 경우는 중앙널길이 대부분이며, 부분적으로 문틀시설 없이 우편재(右偏在)로 제작된 것도 있다. 대부분 도굴로 인하여 훼손되었으나 뚜껑돌이 남아 있어서 고분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앞트기식은 굴식에서 널길이 짧게 되면서 이후에 널길이 없어진 형태를 보이는데, 기본적으로 무덤길(墓道)을 개설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무덤구덩이의 형태는 굴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입구가 터진 형태로 굴광하는데, 전방의 무덤길에는 석축과 같은 시설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다만 돌방과 무덤길이 접하는 부분에서 벽석을 양쪽 옆으로 넓게 쌓아서 문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천장형태는 대부분 고임식이며 일부 양벽조임식의 형태도 확인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굴식과 함께 분포하며, 바닥시설이나 축조 석재에 있어서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앞트기식의 경우 대판석을 다듬어서 벽석을 축조한 예가 관찰되고 있다.

출토된 유물은 은제 관식과 귀고리, 그리고 모자철심이 두부(頭部)주변에서 확인되는 경우가 있으며, 대부분의 고분에서는 일반적으로 널못과 널고리가 출토되었다. 등고선방향으로 장축을 둔 굴식돌방은 다른 돌방무덤에 비하여 유물의 출토양이 많다. 유물의 부장은 머리쪽과 다리의 양쪽 측면으로 다양하며, 부장된 유물 가운데 토기는 항아리와 굽다리접시(高杯), 세발토기(三足器), 깊은바리(深鉢), 작은항아리가 있으며, 철기로는 손칼(刀子)과 주조쇠도끼(鑄造鐵斧)가 있다. 그리고 머리 쪽에서 옥이 출토되었으며, Ⅲ-81호 돌방무덤의 경우 124개에 달하는 다양한 옥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목걸이의 용도로 추정된다.

특징

이번의 조사에서 확인된 염창리 유적은 전체가 백제 돌방무덤 지역으로 유구의 분포범위도 대단히 넓고, 유구 자체의 밀집도도 대단히 조밀하다는 특징이 있다. 조사된 고분을 형태별로 정리하면 크게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선 양벽 조임 굴식돌방무덤과 고임식 굴식돌방무덤, 등고선 방향으로 장축을 둔 굴식돌방무덤, 그리고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양벽 조임·고임식 돌방무덤은 서로 유기적인 상관성을 갖고 변화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앞트기식은 이 굴식의 변화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판단이 가능하다. 다만 등고선 방향을 장축으로 둔 굴식돌방무덤이 6기 조사되었는데, 다른 고분에 비하여 유물의 출토 양도 많고, 굴식돌방무덤으로는 이례적으로 철기가 많이 부장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다른 유형의 고분은 대부분 도굴 및 파괴되었고 출토유물도 거의 없는 형편이다. 염창리 고분군에서 조사된 유구의 구조속성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유적은 백제의 사비도읍기 후반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부여 염창리 고분군 약보고서』(공주대학교박물관, 2000)
「부여염창리군석부락의 호관묘」(강인구,『미술자료』19,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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