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까지 일제는 수리시설 확충 사업을 핵심으로 하는, 이른바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런데 사업은 추진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비가 필요하였다. 그 결과 수리조합원들에게 조합비를 과다하게 부과하게 되었고, 각지에서 납부를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부평수리조합에서의 납부반대운동도 한 예이다.
부평수리조합은 부천군·김포군 2개 군에 걸쳐 있는 총면적 3,676정보의 대수리조합이며, 조합장은 나카다(半田善四郎)였다. 조합의 수리시설 공사가 완성된 것은 1925년인데, 마침 홍수가 일어나 시설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래서 1926년부터 복구 공사에 소요되는 비용이 조합원들에게 분할 부과되었고, 이들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공사 과정에 공사비가 부정하게 사용된 것이 탄로나자, 1926년 12월 지주들은 지주 총회를 열고, 조합비 분담금 경감, 등급 재조정, 부정 사건 진상 규명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지주들은 결의 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합측과 교섭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이듬해인 1927년 10월 15일 이들은 돌연 소작료를 인상하기로 결의하였다. 조합비 부담을 소작인들에게 전가시키려고 의도한 것으로, 소작인들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조합원들의 조합비납부거부운동이 소작인들의 소작료인상반대투쟁으로 전환되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였다. 10월 27일 소작인 대표들은 농민조합을 결성키로 하고, 창립 대회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을 결의하였다.
소작료 인상 반대, 소작료 운반은 10리 이내로 할 것, 비료 대금의 부담은 지주 6, 소작인 4의 비율로 할 것, 소작 기간은 5년으로 하고, 기간 내에는 소작권을 박탈하지 않을 것 등을 내걸었고, 지주측과 교섭할 교섭 위원을 결정하였다.
소작인들은 청년·노동단체와의 연계 하에 활동을 방해하는 일제 및 지주들과 맞서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농업 정책에 반대한 운동으로, 전개 과정에 있어 운동 주체가 초기의 중농·소농층에서 곧 소작농 등 빈농으로 전환하는 등 식민지 하 농민 운동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